<양평누비기 Ⅱ-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13도창의군의 총대장 이인영(李麟榮,1867∼1909)은 1867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서 태어났다. 이미 을미의병 때 류인석, 이강년 등과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제천전투에도 참여하는 등 활약하다가 다음해 고종의 선유로 의병을 해산한 뒤 문경에서 은거했다. 1907년 정미의병이 확산되자 이은찬(李殷瓚,1878~1909) 등 의병 500여명이 찾아와 총대장이 돼 줄 것을 나흘간이나 간청해 승낙하고 원주로 가서 의병원수부를 설치하고 그해 9월2일 관동창의대장에 올랐다. 각지의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했다.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의병전쟁의 합법성을 설명하는 등 국권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또 양평은 물론 횡성, 춘천 등지를 옮겨가며 의병을 규합하며 각 도에 격문을 보내 양주에 집결할 것을 촉구하자 각 도의 의병장과 1만여명의 의병이 모였다. 이렇게 해서 의병연합부대인 13도창의군이 형성됐고 13도창의대장에 추대됐다.

1907년 12월 13도창의군은 통감부를 격파하고 을사늑약을 무효로 만들어 국권을 회복하고자 각 도의 의병들을 이끌고 펼친 것이 서울 진공작전이다. 이인영 총대장은 각 도의 대장에게 정한 날짜에 동대문 밖으로 진군하도록 명령했다. 손수 2000명의 의병을 이끌고 동대문 밖에 주둔했지만 각 도의 의병들이 정한 기일에 도착하기도 전에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후퇴하다 여주에서 일본군과 싸워 패했다. 이때 갑작스런 부친의 사망 소식으로 이인영은 본가인 문경으로 급히 돌아갔다. 그 이후 상주와 황간 등지에서 은거하던 중 1909년 일본 헌병에 잡혀 경성감옥에서 사형을 당해 순국했다.

평해로는 조선시대의 10대로(十大路) 중 서울의 홍인지문에서 강원도 평해(平海, 지금은 경상북도)에 이르는 3대로(三大路)로 거리는 1천여리에 이르는데, 옛 지명으로 보면 ‘흥인문(興仁門)-중량포(中梁浦)-망우리현(忘憂里峴)-왕산탄(王山灘)-평구역(平邱驛)-봉안역(奉安驛)-용진(龍津)-월계(月溪)-덕곡(德谷)-양근(楊根)-백현(柏峴)-흑천점(黑川店)-지평(砥平)-전양현(前楊峴)-송치(松峙)-안창역(安昌驛)’이 서울과 경기도의 구간이다. 즉, 용진에서 송치까지가 양평 땅이고 송치를 넘으면 강원도다. 고개 이름에 ‘치(峙)’가 붙은 곳은 ‘현(峴)’을 붙이는 고개보다 험하다는 의미가 강한데 위 경로에는 빠져있지만 양평 땅에서 ‘치(峙)’자가 붙은 평해로의 첫 번째 고개는 구둔치(九屯峙)이고, 마지막 고개는 송치이다. 구둔치를 넘어 송치에 이르기까지가 상동면(上東面,지금의 양동면, 앞으로는 ‘양동면’이라 한다)구간이다.

양동은 평해로상에 위치한 지역으로 높은 산줄기가 에워싼 산악지대가 많은 분지형(盆地形)의 지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서쪽으로 여주와 동쪽으로 횡성과 남쪽으로 원주와 접해있고 양평, 여주, 원주. 횡성. 홍천과의 거리가 비슷한 반면 서울까지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하루면 이동이 가능한 특징도 가지고 있다. 인근지역으로부터의 의병소모와 주둔이 용이하며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 서울이나 양평방면에서 처 들어오는 적은 구둔치에서, 원주방면에서 처 들어 오는 적은 송치에서 막음으로써 시간을 지체할 수 있고, 반격과 대피도 손쉬울 뿐 아니라 서울이 가까우면서도 군사적 요새로써의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다.

출생지인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와 양동과는 지근거리이며, 자신이 이미 1895년 을미의병에 참여한 바 있는 이인영 의병장으로서는 태어나고 살아온 주변 지리를 잘 알고 있고, 을미의병 중 가장 유력한 활약을 펼친 호좌의진의 발상지로써 유림을 비롯한 주민들의 항일의식이 남달랐던 점 등도 주둔지로 결정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양동에서의 주둔기간은 한 달가량이며, 횡성·춘천 등지에서 군세를 확장하며 모집한 2000여명을 이끌고 10월20일 경 안학관(安學官)과 함께 양동에 주둔했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적어도 그로부터 한 달 전인 9월에 양동을 주둔지로 결정했을 것이다.

10월20일 이후 주변 각지의 의병장과 의병들이 모여들어 그 수가 급격히 늘어나 나중에는 5천여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 주둔하게 되었다. 양동면 내의 주둔지는 섬실동(蟾實洞, 지금의 석곡리 섬실), 삼산리(三山里), 단석리(舟川里, ‘丹石里’의 오기로 보임)라 기록되었으나, 산매실동(‘山梅實洞’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雪梅實洞’의 오기로 지금의 매월리 설매실), 석우리(石隅里, 지금의 금왕1리)일대로 양동면의 전역에 의병진별로 다른 마을에 분산하여 주둔했다. 또한 양동면 계정리와 계정리와 경계를 이룬 횡성군 고모곡면(古毛谷面, 지금의 서원면)에 걸쳐서도 의병의 일부가 주둔하고 있었다.

‘지평현 수서기(首書記)를 체포하여 주민에게 명령하여 군용금이라며 돈을 징수하고, 2~3리마다 보초를 배치 경계하면서 진지를 구축하고 전열을 가다듬었다’라는 일본군의 정보보고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엄격한 군율에 의거 통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주로 갈 의진 중 경기 동부 이남의 이인영, 민긍호, 허위, 전라도의 문태수(文泰守) 의진과 이 진공작전에 사용할 탄약을 구입하기 위해 서울로 들어갔다가 일군에 잡힌 경상남도의 김훈(金壎)도 양동에 주둔해 있었다. 양동은 사실상의 13도창의대진소 창설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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