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서양화가 이자영

양쪽의 가치… 모순 아닌 함께 두는 것
억압하지 않고 조우하는 ‘양가적 감정’
알 수 없는 ‘사건의 지평선’ 끄집어내기

 

▲ 사건 지평선-시작점, 130×162㎝, acrylic on canvas, 2015

‘아코디언 방, 그 속이 보인다. 주름들 사이로 주름을 따라 한 계단 한 계단 오르고 또 내리다 보면 살아있는 온기의 빛은 저토록 끝이 없이 되돌아간다. 그렇게 빠져든다….’ 이자영은 ‘아코디언 방’에서 주름을 시간으로 표현했다. 이 시간은 유한한데 무한한 영역의 상태, 얇은 막이 접혀지고 펼쳐지는 세계에서 안팎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다.

‘아코디언 방’(2008)은 어느 날 이자영이 어머니의 얼굴에 난 주름을 발견하고 드로잉을 하기 시작해 나온 시리즈 작품이다. 작품의 주를 이루는 빨간색은 창백한 현대인에게 뜨거울 정도로 따뜻한 기운을 선사하기 위해서다.

 

▲ 아코디언 방-펼쳐진 세계, 520×162㎝, acrylic on canvas, 2008

‘아코디언 방-펼쳐진 세계’에서 그는 무한대의 영역을 보여준다. 이 구조 속에서 사건이 끝없이 이어진다. 여기서 연속성과 지속의 의미는 물리적인 나아감이 아니라 나와 상대, 서로에게 온기를 만드는 것이다. 그는 “아코디언 방에서 현대인에게 삶의 온기와 의미를 찾아주고 싶었다”고 했다.

 

▲ 얕은 잠-더위, 230×182㎝, acrylic on canvas, 2011

이자영은 첫 개인전 ‘얕은 잠展’(2011)에서 양쪽의 상반된 가치를 함께 두는 ‘양가적’(兩價的) 감정과 상태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잠’은 절대적인 사적 영역으로의 여행이고, ‘깨어남’은 외부의 현실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얕은 잠은 잠을 자는 것도, 그렇다고 깨어있는 것도 아니다. 

작품 ‘더위’는 한여름의 더위(현실)에 짓눌려 잠(희망)을 청해보지만 깊이 들 수 없다. 눈은 감고 있지만 생각은 밖을 향하고 있다. 눈을 떠보려 해도 쉽게 되지 않는다. 파란색이 화면의 3분2를 차지하고 그 아래에 빨간색이 조금 보일 뿐이다. ‘차가운 상태가 있기에 더운 것’이다.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혹은 덥거나 춥다는 선택의 이전에 양가적 상태가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 얕은 잠-더위, 230×182㎝, acrylic on canvas, 2011

이자영은 ‘얕은 잠展’에서 현대사회의 양가적인 상태들을 다양한 모순과 문제들 속에서도 우리의 현재가 이를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는지 살피고 있다. 그는 작가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잔인하고 비열하고 지독하고 창백하고 혼란한 그때가 간다. 아물어간다. 여러 번의 움직임, 계속되는 시도는 질식에 다다른 호흡과 마비같은 무기력을 지나친다. 눈을 감고도 눈을 뜨며 잠에 잠긴다.’

2013년은 이자영이 서울에서 양평으로 이주해 작업실을 차린 해다. 이로부터 2년간 그는 자연에 흠뻑 빠져 지냈다. 결과는 ‘자유의지’의 발산으로 나타났다. ‘어느 날 MAGNOLIA(목련)-이자영展’은 이전의 ‘아코디언 방’이나 ‘얕은 잠’에 비하면 색감은 옅어졌고, 붓질도 힘을 뺀 느낌을 준다. 이전의 작업들이 의식을 내부에 가둬둔 상태였다면, ‘어느 날’은 외부세계와의 소통을 시작하고자 하는 변화의 시도다. 또 이때부터 그의 사고의 지평이 본격적으로 열린 시점이기도 하다. 그의 표현대로 ‘화가로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계기’가 됐다.

 

▲ 어느 날 MAGNOLIA-봄이 오다 LA PRIMAVERA, 375×180㎝, oil on canvas, 2013

현대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 낭만적 상태의 의미를 확장하길 바라는 ‘로망스’, 봄이 가진 생명력과 생의 정점의 순간을 그려낸 ‘봄이 오다’…. 노란색과 옅은 하늘색의 역동적인 붓질은 생의 에너지와 온기, 태양의 빛과 흐르는 물 등 정지해 있지 않은 자연을 추상적으로 담고 있다. 자신의 감정 상태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자신과 그림 간의 소통에 에너지를 쏟는 그만의 작업 태도에서 비롯된 작품들이다. 그는 이를 “똑같이 삶을 살아가는 상태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어느 날 MAGNOLIA-거기 있다, 로망스 No1·2, 각 182×230㎝, oil on canvas, 2013

‘real, virtual, reality’는 이자영이 지난해 겸재정선미술관의 ‘맥 찾기 유수작가 초청기획전’에 참여한 후 그린 작품이다. 겸재의 도전적 화혼을 오늘에 조명하고 이를 재해석해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의도로 연 기획전시회다. 이자영은 “겸재의 끝없는 탐구실험 정신이 현대의 삶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작가노트에 ‘기억에 관한 마비를 벗어나기 위해, 망각되어버린 잔상을 고스란히 회복하기 위해, 사라져버린 과거를 그리고 안을 들여다본다.’고 적었다.

 

▲ 어느 날 REAL, VIRTUAL, REALITY, 260×132㎝, oil on canvas, 2014

이자영은 그림 공부를 하기 전 물리학을 전공한 이력이 있다. 그가 최근 작업에서 ‘이벤트 호라이즌’(사건의 지평선)에 관심을 두는 까닭이다. 존재하지만 알 수 없는 세상이 시작되는 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측 불가의 상태다. 사건의 지평선에 도달하면 사실상 시간은 멈춘다.

그는 이 알 수 없는 상태에 대해 무언가를 끄집어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는 이를 ‘불편한 이야기들’이라고 했다. 이전의 작품들이 양가적 상태와 감정, 시간의 연속성 그 상태 자체를 드러내는 작업이었다면, 이제는 외부세계와 소통을 넘어 작가의 ‘발언’을 하겠다는 것이다. “눈감고 아웅 하지 않고 썩은 내가 나는 하수도를 열어야 할 때인 것 같다”고 하는 그의 다음 전시가 기대된다.

 

(작가가 걸어온 길)

 

▲ 이자영의 그림은 반복되는 상태에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다. 남녀 사이의 달콤한 사랑, ‘로망스’(로맨스)를 작품의 제목에 과감히 다는 이유도 낭만적 상태라는 본질적인 의미를 확장하고, 변이해가는 현대인의 아름다운 사랑을 잊지 않고 싶어서다.

이자영은 1978년 출생해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서울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 2013년 부모님이 거주하는 양평군으로 이주해 서종면 문호리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2011년 첫 개인전(‘얕은 잠’·갤러리 도스, 서울)을 개최하고 올해 갤러리 소밥(양서면 양수리)에서 이자영展 ‘아코디언 방으로 들어가다’를 열었다. 오는 9월 갤러리 소밥에서 장성아와 함께 개최할 2인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달 13일 서종면사무소 앞 북한강 갤러리에서 오픈한 ‘할아텍 15인 작가전, 양평의 재발견’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했다.

‘Korea Young Artist’(부남갤러리, 서울·2006), ‘수구나무 옆을 걷다’(남양주아트센터·2006), ‘숨 쉰다’(남양주아트센터·2006), ‘야생사고’(갤러리 아트지오, 서울·2010), ‘1시 방향의 저글링 떼’(인사미술공간, 서울·2012), ‘투명한 사람’(인 더 박스 갤러리, 서울·2012)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12년 ‘금호 영 아티스트’에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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