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선사시대부터 부족국가를 지나 중세,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에 밀당이 있게 마련이다. 정권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언어와 법률, 상벌이 필요했는데 제정일치(祭政一致) 원칙에 따라 제사장이 통치, 입법, 사법, 행정권을 독점하여 권력 수반이 되었으며 제천의식과 왕실 탄신, 책봉, 혼례 등의 경조사에 주연(酒宴) 잔치를 베풀었다.

굿판인 부여 영고(迎鼓), 고구려 동맹(東盟), 연등회, 팔관회 등으로부터 조선시대에도 세시풍속과 별신제(別神祭) 등과 같은 동네 동제(洞祭), 향토 축제와 윷놀이, 줄다리기, 대동놀이와 혼사, 환갑 등 각종 통과의례에 잔치를 베풀었다. 잔치에는 각종 귀한 동물의 고기와 해산물, 수산물, 전(煎), 국수, 밥, 떡과 유과, 각종 과일과 나물을 포함하여 술이 빠지지 않았다. 이는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고 즐기게 해 권력자가 민심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

조선시대는 지배 계층인 왕가와 양반(무반, 문반)이 전체 인구의 10%이고, 중인이 약 10%, 평민과 상민이 70%, 천민이 10%(조선초는 10%, 10%, 40%, 40%)였다. 중기 말엽으로 가면서 양반은 늘고 노비는 줄어드는데 17세기 초는 인구의 60%가 노비로 오늘날 공산국가와 비슷한 귀족을 위한 나라였다. 글을 아는 지배층은 먹고 마시며 풍류를 즐기며 일은 안하고 책이나 읽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것이 최선이요 남정네들의 일이고, 아녀자들은 출산, 육아, 교육, 농사 등 생업을 도맡았다. 글 좀 아는 이들은 주안상과 기생 끼고 풍류를 즐긴다며 지필묵을 드는 게 다였으니 백성들은 배 고프고 남성 양반들만 좋은 사회 구조였다. 김천택의 <청구영언>, 김수장의 <해동가요>, 박효관 안민영의 <가곡원류> 등은 그들이 즐기던 사설들이다.

우리는 육해공 생물을 가릴 것 없이 다 먹지만 일본은 한반도를 통해 불교가 간 이후 에도시대부터 육식 금지로 콩, 두부, 된장국, 생선을 주로 먹다 보니 체구가 왜소하여 왜구라 했다. 1872년 승려들이 황궁에 난입 시위 이후 야끼니꾸, 스끼야끼 등 육식이 가능해졌다. 라멘(拉麵)의 기원은 1400년 전 중국에서 수제중화 라면이 일본으로 전해졌으며 돼지뼈나 닭육수에 된장, 파 등이나 간장을 넣어 먹었다. 현대식 인스턴트 라면은 기름에 튀긴 면에 육류, 해산물과 야채 등 추출분말을 넣어 끓여 먹는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온 인스턴트 라면은 삼양라면 전중윤 회장이 일본에서 제조법과 설비를 들여와 오늘날 닭, 소고기 분말스프 개발로 한국형 인스턴트 라면이 탄생했는데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며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초밥의 기원은 동남아시아다. 밥을 지을 때 생선을 넣어 자연 발효시켜 먹던 것이 중국으로 가서 좁쌀, 쌀, 피 등을 끓인 후 젓갈식의 염장한 생선을 넣어 발효시켜 먹었는데 생선을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한 발효음식이였다. 일본으로 가서 염장 발효 숙성한 생선살에 내장을 빼내고 밥을 끼워 먹다가 식초를 버무린 밥에 숙성한 생선살을 얹은 오늘날 일본 초밥으로 진화했다. 소금, 간장 염장 장아치가 츠께모노로 장어구이, 덴뿌라, 메밀소바, 계란 등을 주로 먹는데 아침은 반찬없이 미소 된장국, 점심은 찬밥을 물과 함께 정어리, 청어 등 생선을 먹었고 지배 계층은 밥, 된장국, 가다랑어, 두부버섯, 생선조림이나 구이, 장아치 등을 소반등의 쟁반에 독상으로 받아 먹는다.

일본은 고도화, 정밀화된 사회주의국가 체제로 어릴 때부터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를 반복 학습시켜 순종적인 공동체의식을 주지시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언행은 일체 허용하지 않는 사회다. 가족들도 각각 독상으로 받는데, 자기가 받은 상은 내 영토라는 개념이 완강하며 남의 것은 일체 넘보지 않으며 침범하면 칼부림이 난다.

우리 조선시대 잔칫상은 큰 교자상에 다양한 육해공 생물을 조리한 밥, 국, 찌개, 구이, 조림, 떡, 적, 국수 등 차고 넘치는 음식이 차려지는데 손님은 부족하지 않게 소반에 독상으로 주안상을 내주어 손님을 배려하였다. 철저한 남녀구별과 계급사회라 어른과 아녀자, 아이들과 노비들과는 겸상하지 않았다. 쌀이 귀하니 보리, 콩, 조 등 잡곡과 고구마, 감자, 옥수수 등 구황작물도 들어와 부족한 양식을 채웠다.

정1품 벼슬의 최고위직 양반은 곡식 97석을 녹봉으로 받았는데 1석이 144㎏이니 14톤을 년 2회 받았다. 이때는 하루에 아침, 저녁 두끼를 먹었는데 사발에 고봉밥으로 지금의 세배 정도를 먹었다. 국왕은 12첩, 9첩 반상을 받았고 이하는 3첩, 5첩, 7첩으로 홀수 반상으로 받았는데 유교문화의 잔재다.

서양문화가 일찌감치 들어간 중국은 식탁, 의자 문화가 자리를 잡고 여럿이 큰상에 둘러앉아 다양한 음식을 올려놓고 돌려가며 접시에 먹을 만큼씩 떠먹는 밥상 문화이다. 음식의 양도 많아 실컷 먹고 남아야 하며 일본도 남겨야 미덕이고 떨어지면 계속 리필해 주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차와 술도 마시면 계속 리필해 준다. 반대로 한국은 차려준 것을 모두 먹어야 미덕으로 여긴다.

필자는 집에서 할머니 어머니가 해주셔서 어릴 때부터 먹어온 맛난 음식으로 겨울에는 돼지고기 듬뿍 넣어 끓인 김치찌개, 알타리 깍두기 김장김치 넣어 끓인 청국장, 돼지갈비 넣고 김장김치 알타리 넣어 끓인 콩비지탕, 시래기 된장국, 시금치 된장국과 비벼 먹어도 좋고 떠먹어도 맛난 된장찌게, 밤새 가마솥에 끓여 새벽에 만든 손두부를 새우젓으로 끓인 두부찌개와 김치 찢어넣고 들기름 양념장 넣은 순두부, 고추장 된장 무우 넣고 얼큰하게 끓인 동태찌개, 개울이나 도랑에서 잡은 미꾸라지 피레미를 무우 썰어 넣고 대파 깻잎 뚝뚝 끊어 넣고 고추장 풀어 국수, 수제비 끓여 먹는 매운탕, 기름 바르고 다딤이돌 방맹이로 민 소금뿌려 화롯불에 구운 김, 잔불에 구운 고등어 자반, 갈치, 꽁치구이와 무우조림은 그때나 지금이나 최애 음식이다.

제철에 뜯어 말려 놓은 온갖 산나물을 불려 양념 강하지 않게 조물조물 볶은 고사리, 취나물 등과 먹고 남은 것은 찬밥 넣고 들기름 넣어 화롯불에서 비벼먹는 맛은 지금도 그립다. 이때는 땅속에 뭍어 두었던 배추 겉절이, 무우생채, 나박김치가 끝내준다. 봄이면 새우 아욱 된장국과 냉이, 달래 넣은 된장찌게가 입맛을 살린다. 여름에는 미역 오이냉국, 개울에 지천인 물고기 잡아다 끓인 매운탕, 가지를 밥솥에서 쪄 찢어 양념장에 조물조물, 양념장 풋고추찜, 할머니는 육식은 일체 안하시고 나물, 김치만 드셨는데 찬물에 밥 말아서 오이지와 뒤주에 박아놓은 굴비 쪄서 찬물에 밥 말아 얹어 드시는 걸 최고로 치셨다.

중학교를 다니다 서울로 유학을 간 나는 이 음식들이 늘 그리운데 방학이 되어 내려오면 아버지는 돼지갈비만 사서 화롯불에 왕소금 뿌려 구워주시던 맛이 그때나 지금이나 최고다. 감칠맛 나는 멸치육수로 해주신 잔치국수는 그때도 두 세 그릇 뚝딱. 도시락 반찬은 김치, 무우장아치, 오이장아치, 멸치 고추장볶음, 계란후라이가 단골인데 서울로 전학을 가니 생전 처음보는 소시지, 오뎅볶음을 싸오는 걸 보고 놀랐다. 2007년 어머니 돌아가시고 오랫동안 그 된장을 못 먹어 뭘 먹어도 만족함이 없어 너무 고생했는데 지금은 친환경 무농약콩을 재배하여 전통법으로 만든 지평농협, 절골농원, 광이원된장을 만나 할머니 어머니 된장을 먹을 수 있어 너무 좋고 간장, 고추장, 장아치 등 전통식품을 아쉬움 없이 양평로컬푸드매장에서 사 먹을수 있다.

소금에 염장한 각종 야채(딤채<침채<짠지<김치) 간장, 고추장에 박은 장아치에서 진화하여 한국 음식은 고추를 빼놓고 얘기 할수 없다. 고추는 남미 멕시코가 원산지로 14세기에 스페인, 포루투칼, 일본을 거쳐 임진왜란 때 전해졌고 음식이 화려해지기 시작했다. 청양고추는 경북 청송과 영양의 이니셜을 붙여 “청양고추”라 했는데 충남 청양이 원산지라서 청양고추가 아닌데 충남 청양은 앉아서 주웠다. 1983년 중앙종묘와 오뚜기가 공동개발해서 나온 토종품종으로 IMF때 세미니스(멕시코)로 넘어가고 2005년 다시 몬산토(미국)로 또다시 바이엘(독일)로 소유권이 넘어 갔으나 다행히 품종보호권이 한국종자원에 있어 로얄티는 내지 않고 종자를 사다 쓰고 있다. 고추의 매운맛은 한국음식에서 매운맛, 시원한 맛, 깔끔한 대표맛을 주는 요소가 되었다.

근현대에 들어 한국은 외부 침략을 많이 받아서인지 가족이 모두 둘러앉아 빨리 같이 떠먹는 탕, 찌게문화가 발달되었는데 가족끼리라도 먹던 숟가락, 젓가락이 수시로 같이 드나드는 식문화는 바뀌어서 개인접시에 떠먹는 식탁문화로 변화해 가고 있으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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