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면은 옛 양근군 남중면(南中面)으로 전의(세우자리, 전일), 수대(장수마을)를 합하여 전수리라 하였으며 본래 뒷산 백병산에 3형제 바위가 버티고 있어 장수마을이라 하였다. 1987년 퇴촌 양평간 지방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뒤는 산이요 앞은 강이니 벽오지(僻奧地)로, 외부 교통로는 한여울 나루, 운포나루, 상심나루, 다루레기나루 뿐이였으며 차량은 이포나루에서 배로 건너와야 산길을 넘어 올 수 있었다.

양자산, 백병산과 마명산(馬鳴山)이라 쓰고 만명산(萬名山)이라 부른 산에 둘러 쌓인 아늑한 강하면에는 일제 강점기 광산에서 금을 캐다가 만명이 동굴속 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가끔 들어가 우물로 돌을 던지면 10여 분 후에야 “풍덩! 소리가 난다”며 그물은 한강으로 연결되어 있어 자칫 빠져 죽으면 한강으로 나간다나?

도자기를 굽던 사기막(砂器幕), 사호(沙湖)라 부른 전수2리, 금광이 있었고 사금(沙金)이 많은 황금골을 항금리로 고쳐서 금(金) 없는 척 겸손(?)했던 동네, 화담 서경덕 선생이 자주 찾던 성촌(聖村), 덕촌(德村)을 합하여 성덕리로 전)국가대표 축구 최강희 감독과 최근희 서울시립대 대학원장 형제들이 이곳 출신이다.

현 성덕교회 앞 나무숲에는 돌더미가 쌓여 있었고 울긋불긋 줄 매어놓은 성황당과 장승이 있어 오가는 이들이 “고시(수)레!”드리며 풍년과 건강과 평안을 빌던 동제(洞祭)를 지내던 곳이다. 샛말이라 부르고 간촌(間村)이라 쓴 마을 위로 큰바위 두개가 문설주처럼 있어 동문(東門)과 오리나무가 많은 오리골(梧里谷)을 합해 동오리요. 고려말 명문가 연안김씨 시조와 후손 김도(金濤), 김자지(金自知), 김여지(金汝知), 문화류씨 류관(柳寬) 신도비 등 충신묘가 있는 왕충이(旺忠), 운포(상심)나루 근처에 큰 창고가 있던 창데미(倉村)를 합하여 왕창리라.

비가 오는 호우기에는 섬이요. 갈수기에는 걸어서 들어가는 샛강 대하섬(大河島) 옆으로 거센 물이 휘돌아 내려가는 곳을 “한여울”이라 부르고 “大灘”이라 기록했다. 국수리 왕창리간 한여울(양강)대교가 놓이면 교통 분산과 균형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가 될텐데, 김선교 국회의원(국토위) 주선으로 송파-양평고속도로 ‘강하IC’를 검토 중이라 하니 ‘서울특별시 강동구 양평동(?)’이 될 전망이다.

물새들은 유유자적 물놀이하며 배불리 먹는 새벽녘에 물안개 자욱히 피어오르는 아름다운 구름개, 운포(雲浦)와 상심리(上沁里)를 합하여 운심리라 했으며 강북은 양서면 ‘북 상심리’요 강남은 강하면 ‘남 상심리’라 했다.

60~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청정 모래 자갈 바닥의 양강물에서 노니는 다양한 토종 민물 어종이 지천이였으니 주낙과 낚시로 잡는 토종 민물장어, 메기부터 피라미(피래미)와 피라미의 숫컷 불거지(불거치), 눈치 등과 솔(松)가지로 잡는 민물새우, 가을에 수수 이삭을 줄에 매어 양강에 띄워 놓았다가 새벽에 걷어 올리면 참게가 주렁주렁 달렸으며 참게탕과 참게장은 워낙 귀하고 고급음식이라 어른들 몫이다.

팔당댐 건설 전에는 바다로 내려갔다가 산란하러 올라오는 토종뱀장어가 구석구석 계곡까지 올라오고 어른 주먹만한 시커먼 말조개가 지천이였다. 겨울에 강이 얼면 교통이 자유로우니 광주, 양수리, 국수리, 옥천, 양근, 개군, 지평, 여주, 이천을 넘나들며 교제가 이뤄졌으니 옛날부터 혼맥도 이같이 통했다.

강하면은 이해하기 어려운 행정구역이 있다. 보통은 강, 냇가와 산등성이를 경계로 동네가 나뉘는데 퇴촌 넘나드는 염티고개 동쪽 아래 강하면 왕창리 옆 양자산 기슭에 ‘광주시 퇴촌면 영동리’이다. 현재는 퇴촌으로 학교를 다니지만 아이들도 강하, 강남 국민학교를 다녔었고 체신행정도 강하우체국이니 이해하기 어렵다. 현재는 광주시로 남종면(옛 양평군)과도 연계가 안되어 외롭게 '섬'같이 떠 있어 누가봐도 양평군 강하면인데 기이한 현상이다.

인근에는 태조와 태종을 도와 조선을 세운 충무공 퇴촌 조영무 장군이 귀촌하여 말년에 살았고 그의 묘역이 있어 퇴촌이요. 영의정을 지낸 대문장가 상촌 신흠 등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위인들 묘역이 인근에 즐비하며 ‘분원 조선 국립 왕실 백자 도요지’와 ‘천주교 성지 천진암’이 있는데 양강 맞은편이 정약용의 고향 능내 ‘마재성지’다.

정약용의 매제 평택현감 이승훈 베드로가 북경서 세례를 받고 와서 처남들인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권철신, 권일신 형제 등에게 전도하였다. 능내에서 관군을 피해 맞은 편으로 헤엄쳐 양강 건너로 숨어 들어간 곳이 천진암 성지이며, 사색당파로 죽고 죽이는 치열한 당파싸움에 태생이 남인으로 조선이 살길은 중도 실용이라 외친 다산은 서인계로부터 배척, 유배당했고 신앙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외는 잡히는 대로 모두 참수형에 처해 졌는데 서인 세력이 남인계를 제거한 정치 보복이 신유박해아닐까?

그 옛날 택당 이식도, 필자의 선조 신기한 할아버지도 당파싸움으로 밀려 양평으로 귀촌했으니 유교, 성리학은 봉건주의 이데올로기로 쓰이면서 종교화되어 나라와 민족에 큰 상처를 남겼다. 화서 이항로, 택당 이식계는 보수계로 위정척사를 기치로 조선 말엽 대원군의 쇄국을 뒷받침해 망국을 자초했지만 한편, 양평의병을 주도하는 중심축이기도 했다. 양근성지(양평성당)와 천진암, 마재 성지 등에서 양근 출신 선각자들 중심으로 천주교 초기 순교자가 많은 것은 한강 큰 물길로 신문물이 일찌감치 들어왔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 강하면 전수3리 출생인 신왕수 이학박사가 양평의 마을 이름 유래를 격주로 연재한다. 종합 건강기능식품 전문기업 케이지 랩(주), 발효 전문기업 엑센도 바이오팜(주) 회장인 신 박사는 양평군 기업인협의회장을 역임했고, 제41회 무역의날 153만불 달성 백만불 수출탑(대통령 노무현)과 제51회 무역의날 800만불 달성 500만불 수출탑(대통령 박근혜)을 수상했다. 현재는 양평문화원 부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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