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수의 ‘마을 이름에 담긴 역사’

 

고구려 때에는 지현현(砥峴縣)이요, 신라 경덕왕 때는 지평현(砥平縣, 朔州郡, 춘천)이었다. 고려 현종 9년(1018)에는 광주(廣州)에 속했다가 1908년 양근과 지평이 합하여 양평군으로 개편됐다.

1914년 지제면(砥堤面)이었다가 2006년에 남면, 하동면, 군내면을 합하여 지평면(砥平面)이 되었다. 지평(砥平)은 봉미산에서 칼을 가는 숫돌이 많이 나오고 뜰이 넓어 “숫돌 지(砥)”와 “넓은뜰 평(平)”을 써 붙여진 이름이다.

옛적엔 관아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방향을 가리켜 하북, 상동, 하동, 군내, 남면, 상서, 하서면으로 칭했으며 지금의 지평, 용문, 청운, 단월, 양동면이 속했고, 양근보다 더욱 크고 번성했다.

오늘날은 100년 전통의 지평막걸리가 유명하여 양평 해장국과 함께 양평 대표브랜드가 되었는데, 상수원보호구역에 자연보전권역 등 중첩규제로 양조는 고구려 때처럼 춘천으로 가고 유적만 남았으니 양평지역 200여 중소기업들의 애환이다.

기업은 생산기업, 유통기업, 금융기업, 의료기업, 서비스기업 등으로 분류하는데 국세와 지방세, 일자리, 인구 유입의 발원이니 나라와 지역에 근간이 아니던가? 삼국지에 “안민지술(安民之術), 재어풍재(在於豊財)”라, “백성을 평안히 잘 살게 하는 길은 풍요롭고 넉넉하게 살게 해주는 데 있느니라!”라 했는데 높으신 분들이 새겨야 할 말씀이다.

조부님은 말미(馬山, 말뫼) 은진 송씨가문으로 시집가신 큰 누님댁을 자주 다니셨는데 겨울에 강이 얼면 강하면부터 걸어 다니셨다. 특히 587년 전 방조 감찰공 신제(申悌, 사헌부감찰역임)할아버지가 세종때 지평현감으로 4년간(1435~1439) 섬긴 지역이니 더욱 친근한 지역이다.

마을 한가운데를 관통하여 흐르는 물이 구불구불하여 곡수리(曲水里)요, 물이 풍부하고 뜰이 넓어 대평리(大坪里)라. 당대 절세미인이 사는 댁을 훔쳐보려고 뒷산 높은 곳에 올라갔으니 망미산이라 망미리((望美里)요, 온 동네가 숲 풀이 무성하여 무왕리(茂旺里)다. 소나무가 무성한 송곡(松谷)과 송정(松亭)을 오가는 고갯길이라 송현리(松峴)요, 물이 많은 동네 물골 수곡리(水谷里)다. 월파(月波)와 거산(巨山)을 합하여 월산리(月山里)요, 노일(露逸, 老日)과 신촌(新村)을 합하여 일신리(日新里)요, 고개가 많아 옥구촌(玉邱村)과 송현(松峴)을 합하여 옥현리(玉峴里)라.

불법 무도한 국모 시해와 조선침탈, 2차 세계대전의 시작인 을미정변을 보고 전국 최초로 의연히 일어선 의병의 고장, 지평리 전투, 용문산 전투 등 절개와 지조가 잠자지 않고 살아있어 언제 어느 때 나라와 민족에 위기가 오면 봉미산 숫돌에 칼을 갈아 준비하며 분연히 일어서는 의병과 구국의 고장 지평이다.

 

* 강하면 전수3리 출생인 신왕수 이학박사가 양평의 마을 이름 유래를 격주로 연재한다. 종합 건강기능식품 전문기업 케이지 랩(주), 발효 전문기업 엑센도 바이오팜(주) 회장인 신 박사는 양평군 기업인협의회장을 역임했고, 제41회 무역의날 153만불 달성 백만불 수출탑(대통령 노무현)과 제51회 무역의날 800만불 달성 500만불 수출탑(대통령 박근혜)을 수상했다. 현재는 양평문화원 부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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