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영 시인의 ‘인생에 말을 걸다’

김 영 시인(사진 가운데)의 산음1리 노인정 수업 장면.
김 영 시인(사진 가운데)의 산음1리 노인정 수업 장면.

겨울 한파에 옷깃을 꽁꽁 여미듯 안으로만 숨기던 사연들이, 숙명처럼 겪어야 했던 구구절절한 아픔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던 그해 겨울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기억의 창고에서 꺼낸 수채화 같은 투명한 언어들이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와 당당하게 빛을 보기까지 강산이 변한다는 10여 년의 세월이 바람같이 지나갔다.

2012년 어느 겨울날 오전 진료하고 “오후에는 가정방문 나갑니다. 오후 3시 이후에 오세요” 현관문에 알림 글을 써놓고 마을에 다녀왔는데 진료소 현관 앞에는 80세 넘으신 할머님이 벌벌 떨고 서 계셨다. 한글을 모르니까 점심 드시고 2시경에 오신 뒤로 마냥 기다리셨다. 바람 불고 차가운 겨울날 한 시간을 밖에서 추위에 떨고 계셨던 할머니를 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괜히 죄인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가슴 아린 사연으로 ‘어르신 한글나라’를 시작했고 2016년 우울증 및 치매예방 사업으로 ‘나만의 시 짓기’를 시작했다. 그 효과가 바로 나타나지는 않겠지만 나비 한 마리의 작은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태풍을 몰고 온다는 나비효과를 기대하며 꿈을 꾸게 되었다.

농사일 끝낸 시골의 겨울은 비교적 여유롭다. 경로당에 모인 어르신들께 “일본의 펑범한 할머니였던 시바타도요 시인은 92세에 시를 쓰기 시작하여 98세 때 쉬우면서도 잔잔한 감동을 주는 시집을 내서 일본열도를 흔들었습니다. 그분에 비하면 어르신들은 아직 70대 80대로 젊은 연세입니다” 그 말에 눈을 반짝이며 흔들리는 눈빛을 보았다. “내 가슴속 이야기를 하나하나 꺼내 보세요, 지금 이 순간 스쳐 지나는 바람의 이야기를, 꽃이 흘리는 눈물을 글로 표현해 보세요. 또 다른 나 자신을 꺼내어 그리움이든 슬픔이든 모두 모두 녹여 보세요”.

그렇게 해서 처음 시를 써서 갖고 오신 분이 오늘 소개할 채나스자(1942년생)님이다.

부모님이 일본에 계실 때 태어나신 분이라 특이한 성함이다. 구부러진 허리와 아픈 다리를 유모차에 의지해 한 시간 동안 걸어오셨다며 삐뚤삐뚤하게 쓰신 시를 수줍게 내미셨다. 그 시가 바로 ‘그리운 어머니’였다.

※ 단월면 산음보건진료소 소장으로 근무 중인 김영 시인이 한 달에 한 번 어르신들의 시 이야기를 연재한다. 김 영 시인은 2014년 등단해 한양대학교 일반대학원 국문과(현대문학 시전공)를 석사졸업했다.산음·석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시를 가르쳐서 어르신들 시집을 출판해 오지 마을을 ‘시인이 사는 마을’로 특화시켰다. 경의중앙선 양평역과 용문역에서 해마다 어르신들 시화전을 개최하고 있다.

2월의 時 한 편…그리운 어머니

부모님 사랑 듬뿍 받던 소녀가 꽃다운 나이 19세에 남편 얼굴도 못 보고 중매쟁이 말만 듣고 첩첩산골로 시집와 보니 현실은 너무 달랐고 어머님은 홧병으로 40세에 돌아가셨다. 아들딸 낳고 새집도 짓고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지만 딸이 잘 사는 것도 못 보시고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하니 가슴에 얼마나 큰 한으로 남아 있을까 개나리꽃 진달래 피는 봄이 오면 거실에 앉아서 그리운 어머님 생각에 가슴이 미어진다.

어둡고도 긴 터널같이 힘든 삶을 버티게 해준 건 끝내 놓을 수 없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채나스자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 그리워했고 또, 앞으로도 그리워할 어머니는 어쩌면, 아이러니하게도 마르지 않는 詩심의 씨앗을 꽃피우게 만드는 ‘풍요의 정원’이 될지도 모르겠다.

지금 당장 펜을 들어 메모라도 남기는 것이 ‘시의 첫걸음’이란 지난 호의 글을 기억한다면 메모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글 쓰는 훈련을 하라는 말을 하고 싶다.

‘훈련’은 ‘가르치고 배운다’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자신의 글에 대해 배우고 자신의 글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시인을 만드는 것은 재능이 아니라 글을 써 내려가는 추진력에 있다. 피아니스트가 매일 피아노 치듯, 운동선수가 근육을 단련하듯 글쓰기 근육을 키워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생각나는 대로 일단 무조건 써보라.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려면 시 한 편은 고사하고 평생 한 줄의 글도 쓰기 힘들다.

이것저것 쓰다 보면 글감이 보이고 잔가지가 보이고 길이 나타난다. 길 위에 서 보아야 길이 보인다. 그곳에 서보면 어느 날 엄청난 광맥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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