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 중 고엽제 피해로 인해 친환경에 관심
전국 최초 친환경농업특구 선포

지난 15일 민병채 前 양평군수가 향년 83세로 작고했다. 사인은 고엽제 후유증으로, 10여 년 전부터 투병 생활을 이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동생 민병곤 씨는 “성품이 워낙 꼿꼿해 도움받기를 싫어하셨다. 남을 의지해야 할 정도의 건강 상태였는데도 간병인을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민 군수는 “부의금으로 부담 주지 마라”며 휴대전화의 연락처를 정리한 후 자녀들에게도 장례식 불참을 지시했다. 육군사관학교 17기 동기들에게 “나 버틸 수 있다”고 전화를 돌린 후 자리를 정돈하고 침상에 들었다. 잠시 후 오후 7시20분, 친환경 농업의 씨를 뿌린 별이 졌다.

■민병채 군수는

민병채 前 양평군수(이하 민 군수)는 1938년 양평군 양평면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민관식 양평면장으로 공무원이었으며 민 군수 일가는 8대에 거쳐 양평에 거주한 토박이다. 아래로는 당시 남동생 1명과 여동생 2명이 있었다. 6‧25전쟁 이후 동생들이 더 태어났다.

1945년 6‧25전쟁 전란 피난 중 막내 여동생이 목숨을 잃었다. 휴전 이후 동생을 묻은 자리를 다시 찾지 못했고,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한 것이 육군사관학교 입학의 계기가 됐다고 한다. 전쟁 중 음식을 동냥해 동생들의 배를 채웠다.

어린 시절의 민병채 前 군수(왼쪽에서 첫 번째). 전란 피난 중 막내 여동생(오른쪽 첫 번째)을 잃었다. 아버지는 민관식 양평면장. 민 군수의 어머니 뒤편으로 이전 양평역 물탱크가 보인다. 유가족 사진제공
어린 시절의 민병채 前 군수(왼쪽에서 첫 번째). 전란 피난 중 막내 여동생(오른쪽 첫 번째)을 잃었다. 아버지는 민관식 양평면장. 민 군수의 어머니 뒤편으로 이전 양평역 물탱크가 보인다. 유가족 사진제공

양평초등학교, 양평중학교를 거쳐 서울사범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 다른 동기들은 대부분 교편을 잡았으나 민 군수는 군인의 길을 선택, 1957년 육군사관학교 17기로 입학한다. 동기로는 김동진 전 국방부장관 등이 있다.

1961년 소위로 임관 후 1966년 주월 백마사단 포대장을 지내며 월남전에 참전했다. 이후 제1야전군사령부 작전차장, 서강대학교 학생군사교육단장 등을 지내고 1986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민 군수가 친환경 농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군인이었을 때라고 한다. 민 군수가 월남전에 참전했던 당시 미군이 베트남의 게릴라 작전을 봉쇄하기 위해 초목 및 잎사귀 등을 말라 죽게 하는 제초제(고엽제)를 살포했고, 이때 다이옥신 성분이 함유된 고엽제에 노출된 민 군수는 농약의 해악성을 깨닫고는 친환경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이후 민 군수는 고엽제전우회 등에서도 계속 활동했다.

당시 미군이 메콩 강 삼각주 정글에 고엽제를 살포하는 사진. 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당시 미군이 메콩 강 삼각주 정글에 고엽제를 살포하는 사진. 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1986년 전역 후 창원시에 있던 알루미늄 휠 생산업체 ㈜삼선공업에 기획관리부장으로 입사했고, 1995년 1월 10여년 만에 사장직에 올랐다. 같은 해 5월 4일, 사표를 낸 후 기초단체장 입후보 의사를 밝히며 초대 양평군수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민주자유당의 공천을 받은 민 군수는 육사‧군 출신이라는 신뢰감과 성공한 CEO의 경영능력이 부각되며 1만2479표(30%)를 얻어 2위 이병대 후보를 830표 차로 누르고 1995년 6월 27일 초대 양평군수에 당선된다.

초대 양평군수 취임식
초대 양평군수 취임식

4년 뒤 치러진 민선2기 지방선거에선 “군수가 당적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당적을 가진 주민들의 참정권을 박탈하는 것”이라며 무소속으로 출마해 1만9168표(47.24%)를 득표하며 재선에 성공한다.

3년 후 지방선거를 1년 앞둔 시점, 지역에선 대부분 민 군수의 출마를 예상했으나 2001년 12월 1일 “다음 양평군수는 또 다른 사람들의 몫”이라며 지방선거 불출마의 뜻을 밝혔다. 당시 지역기자들이 출마의사 번복에 대해서도 질문했으나 “번복은 절대로 없다”며 이듬해 민 군수의 민선2기는 막을 내렸다.

퇴임 후 노무현 정부 농림부 장관 제1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2003년 7월 23일 11시, 청와대는 기자실에 엠바고(사전보도제한)를 전제로 “대외 농업협상과 농민의 신뢰 속에 친환경적인 개발을 이끌 수 있다”며 신임 농림부 장관에 민 군수가 결정됐다고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그러나 다음날, 청와대는 발표를 뒤집고 허상만 순천대 교수를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한다. 당시 고건 총리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장관 임명동의안을 서면으로 제청해 인사위원회가 다시 열렸고 여기서 1순위 추천자가 변동됐다는 뒷얘기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2004년 3월 18일 민 군수는 열린우리당에 입당 후 다음 날 양평군 여성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적 흐름과 양평․가평의 환경분야와 농업부문의 문제해결을 위해 고심 끝에 어려운 결단을 내리게 됐다”며 총선출마를 선언했다. 이후 열린 17대 총선에선 정병국 후보가 3만9280표(59%)를 득표하며 재선에 성공했고, 민병채 후보는 2만3565표(35.40%)를 득표하며 낙선한다.

민 군수는 정계 은퇴 이후 친환경농업 강의와 천주교 봉사활동, 지역정가 후배들의 조언자 역할을 하며 여생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들에 따르면 2011년경 고엽제후유증으로 인한 암이 발병해 전신으로 퍼졌으나 항암을 거부했다고 한다. 이후 10여년을 투병했으나 흐트러진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이 싫어 간병인을 채용하지 않았고, 지난 15일 꼿꼿한 모습을 마지막까지 지키며 영면에 들었다.

■민병채 군수의 정책은

민병채 군수의 민선1기 슬로건은 ‘인심, 경제, 자연환경이 넉넉한 양평’ 이른바 ‘삼풍정책’이었다. 민 군수는 “군 생활과 기업에서 터득한 경영기법을 행정에 도입하겠다”며 지역경제 및 영농기반 구축과 동시에 자연환경 보존을 추진했다.

민 군수는 초창기 주요 시책 중 ‘공무원의 인식개선’에 큰 비중을 뒀다. 특히 사기업의 ‘친절봉사제’를 도입해 오전 8시 40분부터 군청 800여 명의 공직자가 양평 시가지, 군청 정문, 주요도로 등에서 줄지어 인사하는 광경은 아직도 주민들에게 종종 회자되곤 한다. 이외에도 소규모 전원주택지 조성, 먹는 샘물 개발, 용문산 관광지 확대, 농촌환경 조성을 위한 생활개선시범사업 등 ‘군 실정에 맞는 사업’을 강조했다.

1995년, 양평군청 앞 ‘공무원 친절연습’
1995년, 양평군청 앞 ‘공무원 친절연습’

민 군수는 “각종 규제에 묶인 양평군에서 추진할 수 있는 것은 ‘자연보전과 친환경농업’”이라며 “농업 경쟁력을 강화해 군민소득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특히 1998년 농약사용을 최소화하고 유기농법을 사용하는 등의 ‘양평환경농업-21 프로젝트’를 추진, 양평군 전체를 ‘친환경농업 특구’로 선포하며 2000년엔 농업분야에선 세계최초로 ‘ISO14001 환경농업경영시스템’을 인증받았다.

2000년, 양평군 친환경농업인 연합회 발대식 및 BMW 플랜트 준공식
2000년, 양평군 친환경농업인 연합회 발대식 및 BMW 플랜트 준공식

2000년대 민선2기에선 ‘맑은 물 사랑’을 주요업무로 추진하며 군 상․하수도를 정비하고 환경보전종합계획을 연구했다.

이후에도 ▲친환경 농산물 생산기반 확충 ▲친환경 농산물 유통체계 확립 ▲BMW자연환경농업 시스템 설치 ▲친환경 교육 및 홍보 등 친환경 농업에 박차를 가했다.

하수처리장 확장공사 현장
하수처리장 확장공사 현장

민 군수는 ‘친환경 농업’을 가장 먼저 양평에서 추진․정착시켜 오늘날 친환경농업의 선구자라고 평가받는다.

■주변 사람이 본 민병채

민병채 군수의 친동생 민병곤 (사)농촌나드리 이사장은 민 군수를 ‘머리가 비상하고 꼿꼿했던 의리 있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민 이사장은 “젊었을 때부터 형님은 머리가 뛰어났다. 국민학교부터 육군사관학교까지 1등을 밥 먹듯이 했던 기억이 난다”며 “주변 사람과의 의리를 지켜 신뢰도 많이 받았다. 1회 지방선거 출마 당시 군 출신 사병들과 창원에 있던 삼선공업 직원들이 양평까지 올라와 지지연설을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민 군수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도 알려져 있는데 복잡한 일이 생기면 김수환, 정진석 추기경을 찾아가 고민을 털어놨다고도 한다.

민병채 군수
민병채 군수

민 이사장은 “투병 10년간 아픈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면회를 거절하는 일이 많았고, 자식마저도 본인 장례식에 참여하지 말라고 했다”며 “염하는 곳에 손자도 들어오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 내가 수습했다. 형님은 그런 사람”이라고 말했다.

김선교 국회의원(여주시양평군, 국민의힘)은 민 군수를 ‘개혁적인 리더’로 회상했다.

김 의원은 “민 군수님은 군수 당선 후 ‘군민을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고 말했다”며 “일년간 군청 앞에서 전 공무원들에게 인사 연습을 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월남전의 기억을 바탕으로 친환경 농업을 강력히 주장하셨는데, 당시 농민들이 엄청나게 반발을 했다. 그러나 화학비료를 주지 않는 농업에 대해 농민들을 설득시키고 예초기도 사주며 농업정책에 집중하셨다”며 “읍․면장과 차를 타고 가며 제초제 뿌리는 논을 보면 읍․면장을 야단치기도 했으며 물어봤을 때 모르는 게 있으면 그 자리에서 내리라고도 했다”고 말했다.

또, “공무원 인사를 연공서열이 아닌 능력 순으로 진행해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이 고속 승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나 한명현 前 문화복지국장이 일찍 승진한 케이스”라며 “지역에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충성심 있는 사람을 좋아하셨다. 나에게는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정동균 군수는 민 군수를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양평의 한 시대를 이끌었던 분’이라고 표현했다.

정 군수는 “그 당시 친환경 농법을 이용해 ‘물맑은양평’, ‘친환경 농업’에 대한 브랜드 가치를 고민하고 그게 양평의 20년을 끌고 온 것 보면 그분은 선구자”라며 “농림부장관이 되셨으면 한국 농업의 트렌드가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군수님께서는 20년 전 젊은이들이 만들어가는 순수한 시민사회 세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고, 그 토대 위에 만들어진 단체가 양평군민포럼”이라며 “김승남 전 양평군의회 의장, 송요찬 양평군의회 부의장, 강병국 경기도체육회 사무처장, 저 등 많은 사람들이 군민포럼 출신들”이라며 민 군수가 지금 양평 정치무대의 한 축을 쌓았다고 말했다.

정 군수는 “집에 찾아뵈면 클래식 음악이 틀어져 있고 명상을 하시던 모습이 기억난다”며 “인문학 서적을 좋아하셨는데 책을 모두 도서관에 기증하고 유품을 정리하는 등 삶에 대한 마무리 준비를 하고 계셨다”며 고인의 모습을 회상했다.

▲참고문헌 및 도움 주신 분 - 민병곤 (사)농촌나드리 이사장과 유가족, 김선교 국회의원, 정동균 양평군수, 민선 양평군청 2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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