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순봉 경기도 기본소득위원회 실무위원

올해는 3‧1만세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당대의 민중이 거국적으로 참여한 3‧1만세운동은 독립운동의 출발점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혁명운동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혁명운동 이후 일본은 식민지 지배체제를 더욱 강화했고 민초들의 삶은 점점 더 도탄 속으로 빠져들었다.

조선 말엽 이후 우리 민족이 걸어온 길은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민요 <아리랑>은 이처럼 가시밭길을 걸어온 우리 민족의 한(恨) 많은 정서를 대변하는 최고의 노래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민족 앞에 가로놓여 있는 ‘아리랑고개’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서울 성북구에 아리랑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돈암동에서 정릉 가는 고갯길이다. 이 작은 고개가 언제부터 아리랑고개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이 고개를 아리랑고개라고 하는 것은 왠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리랑고개는 이렇게 특정한 공간에 존재하는 특정한 이름의 고개가 아닐 것 같기 때문이다.

1986년 3월에 나는 꽤 알려진 사람들과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을 연극무대에 올린 적이 있다. 그런데 극 초반에 아리랑 반주에 맞춰 남부여대하고 만주로, 연해주로 살길을 찾아 떠나는 민초들의 힘겨운 모습을 형상화 한 장면이 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아리랑고개’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어떤 때는 마을 앞 고갯길이며, 어떤 때는 마천령이며 두만강이었다. 그것은 아픈 역사였다.

2007년 경 친분이 있는 출판사 대표가 광복절을 앞두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운동사’를 책으로 출판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원고를 미리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인연으로 책 제목을 지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고민할 것도 없이 나는 대번에 <딸들의 아리랑>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구성원들의 운동사 또한 우리 딸들, 즉 조선 딸들의 아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해방된 지 60여년이 훨씬 지났으나 아무런 해결 기미가 없는 한일관계 또한 끝을 알 수 없는 고갯길이라 생각되었다.

식민지배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닥친 분단과 전쟁은 또 다른 아리랑고개였다. 그것은 민족 앞에 닥친 새로운 차원의 문제임과 동시에 새로운 고통이었다. 대탈주라고 해야 할지, 엑소더스(exodus)라고 해야 좋을지 모를 이산(離散)의 발생이 그것이다. 전쟁의 참화로 인한 고통은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이처럼 아리랑고개는 역사에 부대끼는 민초들의 힘겨운 삶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아리랑고개는 미아리고개 옆 아리랑고개이기도 하며 만주와 연해주,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펼쳐진 한인들의 수난사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말하자면 조선사람 혹은 한국인의 발길이 닿는 곳, 스쳐가는 곳이 바로 눈물의 아리랑고개이다. 그래서 우리는 중앙아시아 행 강제이주 열차를 타야했던 고려인의 고통을 까레이스끼 아리랑이라 하는 것이며 하와이에서 멕시코 유까딴 반도까지 이어지는 해외 이민자들의 거친 삶 앞에 펼쳐진 길을 꼬레아노 아리랑이라 하는 것이다. 아리랑고개는 이렇듯 공간적으로는 국내외적으로, 시간적으로는 근현대사를 뛰어넘어 이제 한국인과 함께 까레이스끼와 함께, 조선족과 함께, 자이니찌(在日)와 함께, 코리안과 함께, 꼬레아노와 함께 그 시간과 공간을 확장하고 있다.       

이처럼 눈물의 아리랑은 끝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아직도 8천만 겨레의 가슴속에 있는 현재형의 고개이다. 그런 의미에서 또 다른 이산이라 할 수 있는 ‘디아스포라(diaspora)’에 고통 받고 있는 20만을 헤아리는 해외입양인들의 고통은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이라 할 수 있고 그 수효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든, 중국·시베리아·동남아 국가들을 유리 방랑하는 ‘북조선’ 사람들의 시련은 어쩌면 최신판 북녘 아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이 슬픈 아리랑을 끝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3.1만세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에 품어보는 벅찬 기대다. 때마침 북미관계와 남북관계가 호전되고 있다. 반드시 이 실마리를 붙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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