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희 서울시립대 도시행정학과 교수

오랜만에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내리니 햇살이 눈부시다. 무비자 입국으로 체류 기간이 긴 편이라 입국심사에서 문제가 있을까봐 약간 염려를 했다. 심사관은 여권의 사진만 힐끗 보더니 입국도장을 꽝꽝 찍으면서 “가시면 됩니다.(You could go.)”라고 말한다. “왜 왔냐?”는 통상적인 질문도 없이 싱겁게 끝났다.

짐을 찾아 공항을 나오니 사막의 따스한 햇살과 미세먼지 없는 파란 하늘이 좋았다. 호경기 탓인지 사람들의 표정도 밝아 보였다. 중남미 출신인 렌터카 셔틀버스의 기사도 활기에 넘치는 인사를 건넨다. 손님을 다 태운 후 “천사의 도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혹시 놓고 내린 물건이 있으면 셔틀 기사 중에 두 명의 대머리가 있는데, 진짜 대머리 기사를 찾으면 도와 드립니다. 바로 접니다”라고 인사하면서 장거리 비행에 지친 손님들을 웃게 만든다. 삶의 여유가 엿보인다.

문재인 정부가 3년차에 들어섰다. 그동안 적폐청산과 함께 많은 개혁적인 조치가 시행돼 왔다. 그 중 하나가 주52시간 근무제도의 도입이다. 하지만, 이를 놓고 많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경제수준에 비해 도입이 상당히 늦었기 때문에 꼭 필요한 제도임에도 여러 부작용과 저항이 생길 수밖에 없다. 경제 성장기 동안에는 세계 최장시간 근로가 당연시됐던 면도 있지만 이 제도는 성공리에 도입돼야 한다. 그래야 시민의 삶의 질 향상은 물론, 국가적 재난인 저출산문제 해결에도 기여할 수 있으며, 진정한 선진사회도 만들 수 있다.

이 제도는 단점보다 장점이 압도적으로 많다. 여가시간이 늘어나 삶의 질이 크게 개선된다. 자기개발이나 각종 활발한 여가활동으로 관련 산업이 성장해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고 소득이 늘어난다.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 아이들 양육방식에서의 큰 변화다.

우리나라는 부모가 맞벌이로 바쁘면 아이들이 부모의 얼굴조차 보기 어려운 사례도 종종 있었다. 이런 경우 아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부모에게도 심적으로 큰 부담이 됐다. 어린 손자손녀를 조부모가 돌봐주면 행운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등 사회가 책임을 맡아야 한다. 8시간 근로가 지켜지는 직장에 다닌다면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대부분 근로자는 그렇지 못하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어린 아이를 24시간 동안 돌봐주는 어린이집까지 생겨났다. 이건 정말 아니다. 부모 품을 떠나 24시간 동안 남이 돌보는 경우, 아이들의 정서 발달에 좋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 처한 한 제자 부부는 “이렇게 힘들 바에야 차라리 아이 안 낳고 사는 게 좋겠어요”라고 자괴감까지 토로했다. 결국 이 부부는 최근에 부인이 직장을 그만 두었다고 들었다. 정부가 보육예산을 크게 늘리는 등 아무리 재정지원을 많이 해도 장시간 노동 문화가 바뀌지 않는다면, 국가적 재난인 저출산문제는 해결이 요원하다. 아이 낳아 기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가장 기본적인 소프트 인프라가 바로 주52시간 근무제이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리에 정착시켜야 한다.

주52시간 근무제도의 안착과 함께 각종 제도의 보완작업도 필요하다. 특히 아이들 양육관련 사회적 시스템 구축도 시급하다. LA지역은 학교에서 아침식사를 제공한다. 등교시간보다 30분∼1시간 일찍 부모가 아이를 학교식당에 데려다주고 출근하면, 아이들은 그곳에서 아침을 먹고 교실로 이동한다.

이 제도는 아침 출근 준비에 바쁜 워킹맘에게는 정말 도움이 된다. 혹자는 워킹맘의 노동력 착취를 위한 제도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하지만 가정, 학교, 직장의 협업 시스템이 잘 작동되고 있어서 만족도가 매우 높다고 한다.

부모는 저녁 늦게 퇴근해야 하고, 아이는 학교 파하면 학원을 가야하는 우리 현실을 생각하면, 지금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더더욱 포기하지 말고 나아가야 할 선결 조건이 주52시간 근무제도의 성공적 정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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