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록밴드 ‘키보이스’ 출신 뮤지션 김홍탁

댄스와 힙합음악이 국내 음원차트를 싹쓸이하는 요즘, 영국의 록 밴드 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관객동원 800만 고지에 올랐다. 그들을 사랑했던 중장년층 관객뿐만 아니라 퀸을 잘 몰랐거나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젊은이들에게도 록 음악이 시대를 뛰어 넘어 가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록 밴드는 당시(1963년) 최고의 연주가들이 모여 결성한 ‘키보이스(KEY BOYS)’다. 키보이스는 ‘한국의 비틀즈’라 불리며 최고의 밴드로 군림했고, 리더였던 김홍탁(74)은 가수 조용필이 꼽은 우리나라 최고의 기타연주자다.

천재 기타리스트로 불리며 다양하고 실험적인 음악을 선보여 우리나라 록 음악의 전성기를 만들었던 그가 8년 전 양평에 둥지를 틀었다. 지난 18일 강상면 제이앤백 헐리우드 카페에서 그를 만나 음악이야기를 나눴다.

 

한국 최초의 록밴드 ‘키보이스’의 천재 기타리스트

우리나라 최초의 록 그룹 음반 '그녀 입술은 달콤해'. 왼쪽부터 김홍탁, 차중락, 윤항기, 옥성빈, 차도균(1963)

▲음악 한 지 60년이 돼간다. 어떻게 시작했나… 부모님이 음악을 좋아하셨다. 아버지가 일본 유학을 다녀오셔서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중학교 때 친구네 집 위층에 살던 미군병사를 졸라 기타를 배우면서부터다.

고등학교 무렵부터는 소문이 나 여러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고, 인천 주변의 미군클럽에서 기타를 연주했다. 졸업하자마자 윤항기, 차중락, 차도균, 옥성빈과 함께 키보이스의 일원이 되면서 데뷔하게 됐다.

데뷔와 함께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요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이돌그룹’이었다. 비틀즈 노래를 번안해 부르면서 ‘한국의 비틀스’라고 불렸고, 돈도 엄청 벌었다. 오빠부대를 몰고 다녔는데, 서로 섭외 하려고 쟁탈전을 벌일 정도였다.

▲키보이스에서 나와 히파이브(HE5), 히식스(HE6)를 결성한 계기는… 그룹들이 많이 해체되곤 하는데 성격이 안 맞는다기보다는 하고 싶은 음악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장르의 음악을 하고 싶었다.

삼류밴드에서 노래하던 대학생 최헌을 영입해 활동했던 히식스는 내 음악인생의 전성기였다. 워낙 인기 있는 그룹이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다양한 음악을 시도하던 시절이었다. 가장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음악활동을 했다.

1958년 중학교때의 김홍탁, 어머니가 사주신 기타를 메고

▲최고의 인기를 누릴 때 미국으로 갔는데… 데뷔하자마자 최고의 인기를 얻었는데 어느 날부터 마음 한 켠이 허했다. 내가 실력에 비해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 가서 좀 더 공부하고 실력을 쌓기 위해 떠났다.

버클리 음대를 다니며 좋은 뮤지션들을 만나 밴드를 결성해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5‧18 광주민주화 운동이 터지면서 못 오고 돈을 많이 날리게 됐다. 그 후로 8년을 더 미국에 있었다. 꽃장사도 하고 가발 판매도 하고 고생도 했지만 미국에서의 경험은 좀 더 즐겁고 자유롭게 사는 법을 알려줬다.

 

재능나눔의 삶으로

2015년 재능나눔 36.5 94 퀄텟 드림콘서트를 마치고 자원봉사들과 함께

▲양평은 어떻게 오게 됐나… 미국에서 돌아와 서울재즈아카데미를 설립해 후배들을 가르치면서 바쁘게 생활했는데 학생 때부터 폈던 담배 때문에 폐가 나빠졌다. 의사가 휴식을 권유해 내려왔다. 서울과도 가깝고 공기가 좋아 계속 살고 있다.

▲양평소방서에 재능기부 활동을 하고 있는데… 재능기부보다는 나눔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거 같다. 심혈관질환으로 두 번 쓰러졌는데 양평소방서 119구급대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소방대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가 위해 찾아 갔다가 해줄 수 있는 게 음악멘토가 되는 것이라 시작하게 됐다.

많은 소방공무원들이 트라우마로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돼 미국 버클리음대에서 공부했던 음악치유(Music Therapy)를 접목했다. 반응이 좋아 다문화가정이나 주부, 학생들도 참가하게 됐다. 현재는 소방서, 복지회관, 교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고 군민회관, 국립극장 등에서 공연도 15회 했다.

소방공무원들의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 만든 뮤직테라피 음반

지속적으로 주민들과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은 즐겁기 때문이다. 인천이 태어난 고향이라면 미국 샌프란시스코는 즐겁게 사는 법을 알려준 제2의 고향, 양평은 나눔의 행복을 알려준 세 번째 고향이다.

조만간 ‘양평 재능나눔 예술단’을 만들어 더욱 왕성하게 활동할 예정이다. 또 3월부터는 양평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연주도 하는 인터넷방송도 준비 중이다. 주민들은 누구라도 출연할 수 있으니 관심을 가져달라.

 

재즈를 닮은 음악장이

2017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재능나눔 외에 활동은… 매주 목요일 강상면 제이앤백 헐리우드 카페 공연장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끊임없이 공부하며 음악을 만들고 있다. 사회풍자를 담은 재즈 음반도 곧 발매될 예정이다.

내 음악의 근간은 재즈다. 재즈는 첨단 음악이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노래는 6도 이하의 화성으로 이뤄진다. 재즈는 기본적으로 7도 이상의 화성을 전제로 한 창의적이고 즉흥적인 음악이다. 자유로운 리듬감이 주는 재즈의 편안함은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도 대중에게 다가가고 싶어 하는 내 성향과도 잘 맞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재즈가 지나치게 고급화 돼 있는 경향이 있는데 가장 대중적인 음악이라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기타 연주와 연습이 좋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기타를 치는 그 시간이 행복하다. 계속 대중들 속에서 연주활동을 하고 싶다.

 

김홍탁은

작곡가, 연주인, 음악칼럼니스트

KEY BOYS, HE5, HE6 창단리더

인천 동산 중‧고등학교 졸업

미국 버클리음대 <BIN Faculty Development Sessions> 수료

1984 미국 Sanfransisco East West Entertainment INC 설립, 대표이사 역임

1986~1995 소리기획(Sound Enterprise) 대표

서울뮤직커뮤니케이션 대표이사

서울재즈아카데미 원장

(사) 현대대중음악연구회 소장

한국 Rock 발전 협의회 회장

MBC FM 라디오 음악 칼럼니스트 7년여 활동

SBS 라디오 <김홍탁의 재즈 스테이션> 진행- 한국최초의 공중파 재즈 프로

현 재능나눔 36.5 힐링음악연구소 소장

<수상>

1969 그룹사운드 개인상 기타부문 대상

1971~72 플레이보이컵 쟁탈 보컬그룹 경연대회 대상 2년 연속 수상

2017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저서>

김홍탁의 음악일기, 세광음악출판사 2017

 

저작권자 © 양평시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