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응답하라 1919’ 강연회

장원석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이 강연을 하고 있다.

3‧1운동 당시 온 국민이 시위현장에 나와 목소리를 높였다. 그 함성은 전세계에 조선인들의 강한 독립 의지를 보여 줬고 이후 카이로회담에서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받는데 영향을 끼쳤다. 3‧1운동은 이렇게 혁명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3‧1운동 100주년 마중사업의 일환으로 광복회 양평지회가 주최하고 양평 3‧1운동 기념사업회가 주관한 ‘응답하라 1919’강연회가 지난달 31일 양평문화원 2층 양평홀에서 열렸다. 이날 강연에는 변도상 양평3‧1운동 기념사업회장, 윤광선 광복회 이천‧양평연합지회장, 박광호 월남전참전자회 양평군지회장, 김태원 상이군경회 양평군지회장, 유준 몽양아카데미 회장, 독립유공자후손 등 80여명이 참석했다.

장원석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이 ‘양평 3.1운동의 전개 과정과 주요 인물’을 주제로 강연했다. ▲3‧1운동의 시작과 의의 ▲독립과정에서 나타난 3‧1운동의 중요성 ▲3‧1운동과 여성 참정권 ▲3‧1운동과 몽양 여운형 ▲양평 3‧1운동의 전개과정 ▲양평 3‧1운동의 특별함 ▲양평3‧1운동의 주요인물 등을 이야기 했다.

장 사무국장은 “3‧1운동은 근현대사에 있어 중요한 사건임에도 그 시작이 잘 알려지지 않다”며 특히 “양평의 경우 규모면에서 방대했을 뿐 아니라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할 만큼 치열하게 전개 됐음에도 제대로 연구되고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3‧1운동은 여운형선생이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윌슨대통령과 파리평화회의 앞으로 독립청원서를 보내면서 시작됐다. 신한청년당 당원들은 국내외에서 민족적 만세시위를 조직하고 조선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렸다. 장 사무국장은 여운형 선생과 신한청년당원들이 3‧1운동의 불씨를 지핀 숨은 주역이라고 말했다. 또 카이로 선언에서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약속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3‧1운동 당시 우리민족이 하나 된 함성으로 독립을 요구해 연합국들에게 강한 독립의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3‧1운동 과정에서 나타난 인식의 변화 이야기도 꺼냈다. 3‧1운동은 전국민이 참여한 운동인 만큼 여성들도 목소리를 냈다. 장사무국장은 “3‧1운동 직후에 만들어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한민국임시헌장 제3조에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에 따라 제5조에서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되었다”며 “당시 우리나라 일반인, 독립운동가들의 백정, 노비, 여성 누구나 차별이 없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평등적 사고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양평의 3‧1운동 이야기도 나왔다. 양평은 개성을 제외하고 첫 3‧1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3월10일 서종면에서 처음 만세시위가 발생한 후 25회에 걸쳐 6만9000여명의 군민 중 2만1000여명이 참가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당했으며, 검거인원만 82명일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됐다.

양평의 3‧1운동은 천주교‧천도교‧청년‧기독교‧의병 등 시위주도계층이 다양하고 지리‧종교‧사상‧신분‧남녀차이를 모두 극복한 3‧1운동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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