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재> 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를 선정해달라고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함왕혈에서 튼튼하고 총명한 눈동자를 가진 옥동자가 나왔다. 그들은 그를 하늘이 점지하여 준 자기의 지도자라 생각하고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리하여 함씨들은 자기들이 열망하는 국가를 형성했고, 자기들의 성지를 축조하기 시작하면서 날로 번창하여만 갔다. 번창일로를 걷던 양근 함씨 부족들은 얼마가지 못하여 다른 부족들의 침입으로 오랜 세월 동안 이룩한 성지가 무너지고 위대한 왕도 죽어 함씨들의 국가는 결국 쇠퇴의 길로 접어들어 망하고 말았다. 그 무렵 그 옆을 지나던 과객이 말하기를 “어머니를 저렇게 버려두고 자기들만 번창하길 바라니 국가가 멸망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제서야 양근 함씨들은 선조인 왕이 태어난 바위를 밖에 두고 성을 쌓았음을 깨달았다. 그 뒤 그들은 성지를 양근 함씨 선조의 어머니인 바위를 중심으로 성을 쌓아 번창하려 하였으나 또 다른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아 국가는 융성하지 못했다. 양근 함씨들이 모두 흩어져 살아가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이 있는 것이라 한다. 그 후 현재에 이르도록 양근 함씨 후손들이 그 바위에 보호책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며 선조로 모시고 있다.

양근 김씨의 시조 김인찬(金仁贊)은 양근출신으로 원조(遠祖)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43세손이며 경순왕의 16세손으로 태조 이성계를 도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함은 물론 평생을 개혁과 국방에 힘썼으며, 특히 조선조 건국에 공을 세워 중추원사의흥친군위동지절제사 익화군(中樞院事義興親軍衛 同知節制使 益和君)으로 봉하고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 대광보국 숭록대부 문하시랑 찬성사(大匡輔國 崇祿大夫 門下侍郞 贊成事)에 증직되고 충민(忠愍)의 시호를 받았다.

본디 경주 김씨이지만 이성계에 의해 그의 고향인 양근을 본관으로 하사받았으며, 그가 받은 군호(君號)인 ‘익화(益和)’는 양근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김인찬(金仁贊)은 이성계, 이지란과 도원결의를 맺고 조선(李朝) 창업에 공을 세워 양근(楊根)을 식읍(食邑)으로 받고 녹권(綠卷)과 전지(田地), 노비(奴婢)등을 하사 받았다. 그 후손들이 금령 김씨(金寧 金氏)에서 분적, 그를 1세조로 하여 본관을 양근(楊根)으로 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그의 양근 내 출생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고, 묘소(墓所)도 실전(失傳)하였다. 다만 출생지 및 묘소와 관련해서는 강상면 대석리와 가평군 설악면 이천리(옛 서종면 노문리)라는 설이 대립되고 있다. 묘소와 관련해서는 설악면 이천리에 설단(設壇)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시조의 묘를 실전한 양근 김씨의 시조 김인찬의 후손들은 강상면의 대감마을이 그의 출생지로 추측하고 대감마을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바로 김인찬의 직함 때문이라는데 의심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통계청의 ‘KOSIS국가통계포털(http://kosis.kr)’에는 2015년 현재 양근 김씨는 전국에 7703인 인 것으로 나타났다.

양근 이씨(楊根 李氏)도 ​있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에 양근 이씨가 등재되어 있다. 1593년(선조 26)에 출생하여 1637년(인조 15) 별시(別試) 병과(丙科)에 합격한 이만창(李萬昌)이라는 분이 양근 이씨라고 적혀있다. 아버지는 이늦동(李㗡同)으로 품계는 어모장군(禦侮將軍)이었고, 동생은 이명길(李命吉)이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어떻게 양근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적혀있지 않다. ‘KOSIS국가통계포털(http://kosis.kr)’에는 2015년 현재 양근 이씨는 전국에 14인 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평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도 있다. 지평 이씨(砥平 李氏)이다. 대표적 인물로는 어사대부(御史大夫) 이적(李勣, 1162~1225)이다. 이적 장군은 고려 고종 때의 무신으로 본관이 지평인 대장군 준선(俊善)의 아들이다. 합문지후(閤門祗候)ㆍ병부낭중(兵部郎中)을 거쳐 1216년(고종 3) 우군 병마판관으로 서북면에 침입한 거란군을 몽탄역에서 격퇴하고 경상도 안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거란의 재침입이 있자 좌군병마부사로 출전, 광탄에서 대승하고 상서좌승에 임명되었으나 강동성(江東城)이 아직 적의 수중에 있었으므로 동북면병마사가 되어 적을 무찔렀다. 1219년(희종 6) 우승선에 오르고 추밀원부사ㆍ상서좌복사ㆍ지추밀원사ㆍ추밀원사ㆍ어부대사 등 요직을 역임했다. ‘KOSIS국가통계포털(http://kosis.kr)’에는 2015년 현재 지평 이씨는 전국에 79인인 것으로 나타났다.

**양평누비기Ⅰ(56회,1년 2개월)과 Ⅱ(71회, 2년9개월) 등 총 127회(3년 11개월)동안 성원해주신 독자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양평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지역을 가꾸고 사랑하는 일에 더욱 매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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