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누비기 Ⅱ-영춘 이복재 경기도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사천은 우리말로 ‘사내’인데, 지금도 용천2리의 마을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사탄천유역일대를 사천이라고 이름 붙인 사람은 물론 현기였다. 오봉 이호민은 아들(현기)이 도연명의 유사천(遊斜川)시를 보고 이름이 같음을 확인하고는 그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좇아 이곳에서 자신의 귀거래를 이루려 했고, 이곳의 옛 지명 사나(舍那)를 고쳐 사천이라 이름 하였다고 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사나사를 사천사로 개명하고 이 일대의 이름을 사천으로 고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훗날 정약용(丁若鏞)이 양근 인근에 살면서 이 지역을 읊은 시문을 많이 남겼는데 사천사라는 이름을 자주 썼던 것으로 보아 짐작할 수 있다.

이호민의 나이 67세 때인 1619년에 당시 성남(城南)에서 대죄(待罪)중에 쓴 글로 도연명의 유사천 10운에 차운한 시에 붙인 서문은 다음과 같다.

“용문산의 서쪽에 별천지 같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있으니 내 선조의 묘가 이곳에 있다. 옛 이름은 사나인데 사나는 대개 불교 용어이니, 고려의 승려 보우가 이 골짜기에 살았기 때문에 불교용어를 쓴 것이 아니겠는가? 일찍이 도연명의 정절집(靖節集)에 소인(小引)을 아우른 유사천시가 있음을 보았는데, 이 골짜기 또한 사천이라 이름하여 후대에 잘못을 입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우리 집 아이 경엄은 지명이 같음을 기뻐하고 돌아갈 바가 있음을 즐거워하여 드디어 사나를 고쳐 사천의 글자를 쓰고 그 아래에 집을 지었다. 나는 우리 아이의 마음 씀이 부지런함을 가상히 여기면서 내 아이가 늙은 것을 슬퍼하고, 여기에서 노닐 기회가 없음을 서글퍼하며 선생의 시 10운에 따라 그 뒤를 이으니 훗날에 보는 자들이 그 참람함을 용서하면 다행이겠다.”

현기가 사천장팔경도를 가져와 월사 이정구에게 시를 부탁함에 따라 그는 사천장팔경도시서에 사천장팔경에 관해 썼다. 사천장팔경도시서의 팔경(八景)은 ‘용수의 맑은 산 기운〔용수청람(龍峀晴嵐)〕’, ‘운봉의 흰 달〔운봉호월(雲峯皓月)〕’, ‘사나사(舍那寺)에서의 신선 방문〔사사심진(舍寺尋眞)〕’, ‘침교의 권농〔침교권경(砧橋勸耕)〕’, ‘문암의 계곡〔문암동천(門巖洞天)〕’, ‘건지의 소나무와 잣나무〔건지송백(乾支松柏)〕’, ‘군성의 새벽 고각〔군성효각(郡城曉角)〕’, ‘제탄의 저녁 돛단배〔제탄모범(蹄灘暮帆)〕’이다. 이정구가 쓴 사천장팔경도시서는 다음과 같다.

“(국역으로 앞부분은 생략)내가 그 그림을 자세히 보니 전장〔莊〕이란 것은 본 적이 없지만 이른바 팔경이란 것은 내가 이미 다 구경한 것이었다. 을사년(1605, 선조38) 봄, 내가 경기 관찰사로서 영릉(英陵)을 참배하고 돌아오던 길에 여강(驪江)을 건너 벽사(甓寺)를 유람하고 지평(砥平)을 경유하여 용문사(龍門寺)에 투숙한 다음 내외령(內外嶺)을 넘어 사나암(舍那庵) 등의 절에 올라갔으며 다시 양근(楊根)을 거쳐 대탄(大灘)에 배를 띄우고 강물의 흐름을 따라 내려왔다. 이리하여 무릇 산중에 머무는 사흘 동안 거의 모든 곳을 샅샅이 유람하였는데 천암만학(千巖萬壑)의 온갖 경치들을 일일이 구경할 겨를조차 없었다. 어찌 일일이 그 이름들을 기억할 수 있었겠는가. 산기운〔嵐〕이란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하겠고 단지 희뿌옇고 푸르스름한 공기가 산에 서려 있던 것만 기억할 뿐이며, 달이란 것이 당시에 어떠한 형상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고 단지 밝고 은은한 빛이 산봉우리에 어려 있었던 것만 기억할 뿐이며, 신선을 방문했다는 것은 무슨 일인지 나는 알지 못하겠고 단지 석탑(石塔)에서 전조(前朝)의 고적을 찾고 선감(禪龕)에서 나옹(懶翁)의 의발(衣鉢)을 구경했을 뿐이다.

산사를 나왔을 때 취한 몸을 남여(藍輿)에 실은 채 한 석동(石洞)을 지나 세 개의 큰 시내를 건너니 바위가 두 손을 모은 듯 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이 마치 석문(石門)과도 같고 물이 감돌아 흐르는 것이 마치 띠와 같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문암(門巖)이며, 이른바 사천(斜川)이다. 산 아래 몇 곳의 마을이 멀리 보이고 뽕나무가 우거져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자릉이 말한 전장인가. 시내 저편에 불쑥 솟은 멧부리에 소나무와 회(檜)나무가 울창하였으니, 이것이 건지(乾支)인가. 다리 아래 큰 들판에는 농군들이 논밭에 가득하였으니, 이것이 침교(砧橋)인가. 군재(郡齋)에서 잠 깨었을 때 성의 고각(鼓角) 소리가 새벽에 울려 퍼지고 시야에 가득 보이는 안개 낀 물결에 돛단배가 떼 지어 떠 있었으니, 군성(郡城)의 고각과 제탄(蹄灘)의 돛단배가 바로 이것인가 아닌가. 그림을 펼쳐 일일이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니 마치 예전에 다니던 곳을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웠으니, 종소문(宗少文)의 와유(臥遊)보다 훨씬 낫다 하겠다.

이렇고 보면 사천의 팔경을 내가 자릉보다 먼저 구경한 것이다. 그림도 직접 구경한 것보다 못하거늘 하물며 문자로 형용한 것이야 말할 나위 있겠는가.(뒷부분생략)“

이정구는 사천장팔경도에 표시된 10곳, 즉 사천(斜川), 사천장(斜川庄), 용문산(龍門山), 문암(門巖), 침교(砧橋), 제탄(蹄灘), 양근군(楊根郡), 건지산(乾支山), 사나사(舍那寺) 가운데 사천과 사천장을 뺀 8곳을 팔경으로 지정하여 설명하였던 것이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사천은 지금의 사탄천유역일대를 총칭하는 지명으로 사천장팔경도에 그려진 범주는 사탄천일대에 국한되지 않고 더 넓다. 사천장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를 확대시켜 사천장의 문화적, 경제적 영역을 확대시키려한 의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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