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누비기 Ⅱ-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양근과 지평에서 양평군이 되기까지의 연혁을 종합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본래 양평이 속한 한강 이남은 백제의 영토였다. 백제가 한강이북을 점유한지 105년 되던 해인 475년(개로왕 말)고구려의 장수왕은 남정(南征)을 감행하여 한수 이남까지 영토를 확장함에 따라 새로 점령한 지역에 새로운 군현제도를 실시되었으므로 처음 양근군〔楊根郡,항양(恒陽) 또는 거사참(去斯斬)이라고도 불렀다〕과 지현현(砥峴縣)이 설치되었다.

551년(신라 진흥왕 12)에 백제와 신라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함에 따라 양근·지현을 비롯한 한강유역을 탈취했으나 다음해인 552년 신라가 동맹을 파기하고 한강유역을 점령하게 되어 신라에 속하게 되었다.

신라가 3국을 통일한 후인 747년〔경덕왕(景德王) 16〕에 양근을 빈양(濱陽)으로 고치고, 소천군〔泝川郡:지금의 여주, 泝(소)를 沂(기)로도 썼으며, 후에는 기천군(沂川郡)이라 했다〕의 영현(領縣)이 되었으며 지현을 지평현(砥平縣)으로 바꾸고 삭주(朔州:지금의 춘천)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양근군은 고려 초에 빈양이라 쓰던 읍호를 옛 이름〔양근군〕으로 복구하였다가 1018년〔현종(顯宗) 9〕에 양근과 지평이 모두 광주목에 내속(來屬)되었다.

고려시대에 양근에는 1175년〔명종(明宗) 5〕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1257년〔고종(高宗) 44〕에 영화(永化)라고 불렀다. 1269년〔원종(元宗) 10〕에 위사공신(衛社功臣) 김자정(金自廷)의 고향(故鄕)이어서 승격시켜 익화현령(益和縣令)이 되었다. 1356년〔공민왕(恭愍王) 5〕에 왕사(王師) 보우(普愚)의 고향이므로 승격시켜 양근군(楊根郡)이 되었다. 1356년(공민왕 5)에 보우가 미원장(迷元莊)의 소설암(小雪庵)에 우거(寓居)하므로, 미원장을 현(縣)으로 승격시키고,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얼마 후 땅이 좁고 인구가 적다고 하여 다시 양근현에 소속시켰다.

지평은 1378년(우왕 4) 우왕 유모〔劉媼〕 장씨의 고향이라 하여 광주목 내속 360년 만에 승격되어 감무를 두었다가 다음해인 1379년(우왕 5) 12월에 장씨를 지평으로 유배시키면서 다시 폐현되었다. 1391년(공양왕 3) 현지경에 철장을 두고 감무를 설치하여 겸하게 하였다.

조선이 개국한 이후에도 양근은 군이었는데 1658년(효종 9) 지평(砥平)에 편입시켰다가 1668년(현종 9)에 다시 설치하고, 1728년(영조 4)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1741(영조 17)에 복구하였으며 1776년(정조 즉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1785(정조 9년)에 복구하였다. 옛 치소는 건지산(乾止山:지금의 옥천면)에 있었는데, 1747년(영조 23)에 갈산(葛山:지금의 양평읍)으로 옮겼다. 1895년(고종 32)에 다시 군으로 고치고 10개 면을 관할하였다.

지평은 1413년(태종 13)에 비로소 현감으로 고쳤으니 이는 고려조인 1388년(우왕 14)에 전국 여러 현에 감무를 두고 참외ㆍ권무ㆍ이전 등 모두 낮은 관직으로 임명하였던 것을 시정하여 현과 그 책임자의 위상을 높여주고자 예와 같이 복구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1685년(숙종 11)에 강상죄인 해옥의 일로 폐현되어 양근에 편입되었다가 1688년(숙종 18)다시 설치하였으며,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고치고 8개 면을 관할하였다.

1908년 양근과 지평이 통합하여 양평이 되기 전까지 두 고을은 가까운 이웃고을이었다.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10년간은 지평으로 두 고을이 합해졌고, 3년간은 양근으로 합해져 두 번에 걸쳐 13년간 합해졌던 역사도 있다.

대한제국기인 1908년(순종 융희 2) 9월14일, 두 고을은 통합되었고 군호를 양근의 양(楊)과 지평의 평(平)을 따 양평(楊平)이라 하였다. 통합당시의 관할 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 양근군의 10면과 지평군의 8면을 합한 18면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1912년 5월 23일에 발간된 조선총독부편 「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 경기도편에 양평군은 19개면 354리를 관할하고 있다고 적혀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12월29일에 공포된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1914년 4월1일자로 남종면을 광주군에 편입시키고 여주군 금사면(金沙面)의 전북(箭北),용담(龍潭)의 각 일부와 같은 군 대송면(大松面)의 곡수(曲水),산촌(酸村)의 각 일부와 대신면(大神面)의 전후곡(前後谷) 일부와 개군면(介軍面)의 공세리(貢稅里) 일부와 광주군 퇴촌면(退村面)의 영동리(嶺東里)와 강원도 원주군 지정면(地正面)의 판대리(判垈里) 일부를 병합하였다. 1915년 5월1일에 공포된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12개면 112리로 이때의 각면과 관할리는 갈산면 12개리, 양서면 11개리, 설악면 14개리, 용문면 13개리, 지제면 10개리, 청운면 9개리, 단월면 9개리, 강상면 7개리, 강하면 6개리, 양동면 8개리, 고읍면 4개리, 서종면 9개리이다. 1937년 8월 고읍면을 옥천면(玉泉面)으로 고치고 1938년 4월 1일 갈산면을 양평면(楊平面)으로 고쳤다. 1942년 10월 1일 설악면을 가평군에 이속시킴으로 11개면이 되었다.

광복 후인 1963년 1월1일에는 여주군이었던 개군면이 편입되어 다시 12개면이 되고, 1973년 7월1일 서종면의 삼회리가 가평군 외서면으로 이속되고, 노문리 일부가 가평군 설악면에 이속되었다. 1979년 5월1일 양평면을 양평읍으로 승격시켜 1읍11면이 되었고, 2006년 12월1일에는 지제면을 지평면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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