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누비기Ⅱ-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임진왜란 기간 동안 한강방어의 중요성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주목을 받은 양평에서 “양근군수가 창의한 주민을 통솔하여 용진의 상류, 가평경계의 골짜기와 자세한 길 및 얕은 여울을 안 뒤에 기다리고 있도록 하였다”는 『경기읍지』의 기록에서 보듯이 양평에서도 의병이 일어나 군수와 함께 활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초기 신륵사와 양평의 구미포(龜尾浦,개군산 아래 남한강 나루터로 당시에는 여주목에 속해 있었음)에서 강원도 조방장(助防將) 원호(元豪,1533~1592)장군이 향병(鄕兵,의병을 뜻함)과 함께 왜군을 기습하여 향군이 승전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지평현감(砥平縣監)에 기용되어 관직에 나갔다가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관련이 있다하여 탄핵받아 파직되었던 남언경(南彦經)은 1592년 여주목사(驪州牧使)에 다시 기용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들과 함께 싸웠다. 그러나 퇴계 이황(退溪 李滉)을 비판하였다하여 삭탈관직당하고 양근에 살면서 의병들과 함께 왜군을 상대로 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병장 이일〔李軼, 순변사(巡邊使)로 삼아 내려가 상주와 충주에서 왜병과 싸운 이일(李鎰)과 다른 인물〕의 군사 600명이 양근에서 주차(駐箚)하였다는 1593년 1월11일의 『선조실록』 기사가 있다. 그는 공신에 대한 보답의 의미로 설치한 양반의 특수병종인 충의위였지만 그 외의 인물정보나 활약상 등 자세한 내용은 전해오지 않는다.

그밖에도 이증(李增,1556~1593)이 양평에서 다수의 의사를 모집하여 무기와 군량 등 행장을 꾸려 평양성부근까지 토벌에 나서 그곳에서 각 지역에서 모여든 의승군과 합세하여 1593년(선조26) 평양탈환 작전에 참가하였고, 이후 전사하여 의관으로 양평읍 공흥리 단지동 선영하에 장사지냈으며, 조정에서는 장사랑(將仕郞)을 추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 등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임진왜란 때 의병에 참여한 분들이 많을 것으로 보이나 임진양평의병 참여인물에 관한 자료나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대평리 배잔마을 아래 대평저수지 도로변에 있는 임진의병전적지공원의 주인공은 양평사람이 아니라 인근 여주 출신 정응린(鄭應麟,1531~1592)이다. 그는 왜적에 의해 서울이 점령당하고, 임금이 몽진하자 나라를 구하려고 여주에서 의병을 모아 양평 땅에 와 적을 상대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그는 적이 통하는 남북의 길을 차단, 고래산에 진을 치고 종일토록 혈전을 거듭하였으나 인근의 왜적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어 산을 포위하고 공격해 옴에 따라, 패현에서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맏며느리 청풍김씨와 넷째 아들 일(鄭逸)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에워싸고 왜적을 꾸짖으며 막아섰으나 모두 적의 총칼에 순절하고 말았으며, 500여명의 의병들이 거의 전멸 당하다시피 하였다. 이후 복수청(復讐廳)을 설치하는 등 충의를 다한 큰아들 적(鄭迪)만은 군수물자조달을 위해 외지에 나가 무사했다.

정응린의 전사일은 1592년 5월8일로써 의병을 모집하여 양평에 온 것은 4월 말경일 것으로 보인다. 원호가 여주에서 향병을 소집하여 5월말 경 신륵사에서 적의 일부병력을 기습하여 전투한 것과는 한 달 정도 빨랐고, 곽재우가 전국에서 제일 먼저인 4월 22일에 그의 고향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보다는 조금 늦은 시기이니 발 빠른 거의(擧義)였다.

정응린부자의 충절을 포장(褒章)할 것을 청하는 유생 이양대(李養大) 등이 1725년(영조1) 상소하여 조정에서 논의한 내용이 적혀있는 승정원일기는 다음과 같다.

“(앞부분 생략) 옛날 임진왜란 때에 정응린은 전 현감으로서 부친상을 당해 고향 집에 내려가 있었으므로 미처 임금을 호종(扈從)하지 못하였지만, 나라를 위해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슬픔을 참고 상복을 벗어던지고 고을의 자제들을 끌어 모아 의병 한 부대를 결성하여 임금을 도울 계책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적병이 원근에 가득하였는데 정응린은 기발한 꾀와 비밀스런 계책을 많이 사용하여 진영의 부락을 불태우기도 하고 유격병들을 섬멸하기도 하였으니 이와 같은 경우는 매우 많았습니다. 하루는 왜적이 관동(關東)에 들어간 것에 대하여 전패(全敗)당할 것을 걱정하고 차단될 것을 두려워하여 큰 무리를 이끌고 급히 지평(砥平) 고라산(古羅山) 아래에서 포위했습니다. 정응린은 스스로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몸으로 칼과 화살을 받아 죽을 것을 알았지만 의로운 마음은 격동되어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무리에게 맹세하고 종일토록 치열하게 싸워 손수 사살한 적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힘이 다하고 화살도 떨어져 마침내 적의 탄환에 맞아 죽었으니, 고라산 패현(敗峴)의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하며 지금까지도 그 고개를 지나는 자는 그 이름을 생각하고 그 자취를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이는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아는 것입니다.(이하 뒷부분 생략)”

전사·순절 133년 만에 정응린 의병장은 충신으로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아들 축은 충효로 자헌대부 형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청풍김씨는 효열로 정부인에 추증되어 함께 정려하였다.

사라진 지명인 패현은 지평면 망미리 절운마을과 대평리 배잔마을 사이에 있는 절운고개이고, 패현리는 지금의 배잔마을이다. 지명은 사라지고 없지만 역사만은 살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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