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가 배낭여행을 간다고 해서 용감하게 따라 나섰다. 영어도 힘들고 체력도 힘들고 무엇보다 걸리는 식구들이 너무 많지만 지금 아니면 언제 오겠냐 싶어 용기를 냈다. 중년의 뻔뻔함이 용기를 내는데 도움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믿음직스럽게 자란 큰 딸이 결정적 의지가 되었다. 남편의 주도로 몇 번 가족여행을 간 적은 있지만 단 둘이 나서기는 처음이라 서로 의지하며 비행기에 올랐다. 가족이야기도 많이 하고 우리 집 동물들과의 추억거리, 주변에서 만나는 사소한 것 등 관심사가 겹치니 레이더에 들어오는 것을 공유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중 단연 눈에 띈 것은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우리네와 다른 산책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비가 추적거리는 가운데 숙소를 찾아가는데 밤에 강아지에게 우비를 입혀서 함께 어디론가 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냉랭하던 런던이 푸근하게 느껴졌다. 다음날 되니 많은 사람들이 강아지와 함께 런던 시내 한 복판에서 다양한 모습의 개와 함께 걸어 다니고 있었다. 노숙자로 보이는 한 사람은 큰 개에게 따뜻하고 멀쩡한 옷을 입히고 본인은 누덜누덜한 옷을 입은 채 구걸 통을 놓고 개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개는 더 달라고 보채지도 않고 조용히 옆에서 지나가는 사람들만 쳐다보고 있었다. 요동하나 없는 자세로 주인 옆을 지킨다는 생각이 들게 앉아 있었다. 우리나라였다면 TV에나 나올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앞으로 평범한 시민들이 강아지를 데리고 다닌다. 출근을 같이 하는지 그 시간에 그런 복장으로 개와 함께? 그냥 추측만 하며 아줌마 궁금증을 내려놓았다.

여기도 박물관은 개가 입장을 못하는데 공원은 출입에 제한이 없다. 개들이 응아하기를 기다렸다 봉투에 담아가는 모습을 런던공원에서 자주 보았다. 하지만 유럽이라고 다 그렇지는 않은지 바르셀로나나 프라하는 곳곳에 개똥들이 보여 앞서 가는 사람이 뒷사람에게 ‘opps!’ 하며 똥을 피하라는 제스처를 하는 바람에 나도 얼른 피했던 기억도 있다. 정책인지 문화인지 알 수 없지만 크기나 모습이 다양한 반려견을 데리고 나와 야외 식당에서 친구들과 식사 겸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개들은 주인 옆이나 발치 아래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가끔 허리를 숙여 개목을 툭툭 쳐 주며 말도 걸어주며. 반려견과의 끈끈한 애정은 어디서나 느껴졌다.

공원에선 자유롭게 뛰노는 더 다양한 견종의 강아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름 있는 종이 아니면 똥개로 취급받는 우리나라도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아직 멀었다. 게다가 그렇게 많은 개들이 섞여 놀아도 싸우는 모습을 보질 못했다. 그리고 주변에 관심이 별로 없다. 오로지 주인과 발 맞춰 가는 것. 주인이 서면 주인 얼굴만 바라보고 앉아 있거나 가만히 서서 있고 주변을 촐랑거리며 방정맞게 뛰어다니지도 않는다. 야단을 많이 친 걸까? 별 상상을 다해 보지만 그래도 부럽다.

비행기를 타고 장거리 이동을 하는데 머리가 지끈거리는 감기에 걸려 괴로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뒤에서 의자를 치고 밀고 난리다. 쳐다보니 예닐곱 살 된, 영국인으로 보이는 아이가 도통 가만있지를 못한다. 나도 괴로운데 오죽하겠나 싶어 몇 번 제지를 하다 포기했다. 아무리 아이라지만 말귀 알아듣는 사람도 그런데 하물며 강아지들이야. 하지만 유럽에서 만난 강아지들은 ‘나는 같이 사는 사람을 신뢰하고 무조건 좋아해요. 무엇이든 하겠어요’라는 자세다. 무엇이 강아지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사람에게서 그런 믿음을 받았겠지만, 어떻게? 궁금증을 안고 일본으로 왔는데 요란한 빨간 가죽바지를 입은 할아버지가 드레스 같은 옷을 입힌 강아지와 함께 동물병원으로 가는 모습을 봤다. 나도 사대주의에 젖어있나? 유럽에서 자연스러운 산책모습을 흡족하게 보다 마주한 일본의 생뚱맞은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다.

그나저나 말 못하는 동물에 대한 예우, 그건 예우라기 보단 완전한 동반자 모습이었다. 따뜻한 눈길과 한없는 절대적 믿음. 그게 당연한 상식인 나라가 너무 부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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