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모형 제작의 대가 - 기흥성 회장
1960년대 여의도 개발부터 평창올림픽 시설까지
축소판 세상 만들어 대한민국 역사 한눈에 보다
웬만한 대형건축물, 손닿지 않은 모형 없을 정도
모형제작 인생 50주년 기념해
강하면에 ‘기흥성뮤지엄’ 개관
세상 축소해 과거 기록
손끝으로 또 다른 미래
세상을 축소해 과거를 기록하고 미래에 남기는 ‘소인국의 걸리버 할아버지’ 기흥성. 올해로 모형 제작 인생 50년을 맞은 그는 이 분야 대가로 손꼽힌다. 미니어처 제작의 선구자로서 아버지와 건축 후학들을 위해 자신의 작품 인생을 총망라하는 ‘기흥성 뮤지엄’이 지난 1일 강하면 전수리에 문을 열었다.
㈜기흥성의 설립자인 기흥성 회장의 모형 인생은 지난 시절 우리나라 경제와 문화의 모든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여의도 개발, 경부고속도로, 서울 지하철, 포항제철 등 1960∼70년대 ‘개발연대’에서부터 독립기념관, 서울올림픽 주경기장, 인천공항, 영종도 신공항, 상암월드컵경기장, 경부고속철도, 평창동계올림픽 시설 등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대한민국 가는 곳마다 내가 손을 안 댄 곳이 없다. 마치 우리나라 전체를 손으로 빚어서 만든 것 같아 지난 세월의 감회가 새롭다.” 기 회장은 “한강은 눈감고 그릴 수도 있고, 골목까지 다 외우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웬만한 대형 건축물의 모형 한쪽 끝을 보면 반드시 ‘기흥성’ 제작 표지가 붙어있다.
박물관 2층 전시관에서 현존하는 현대 건축물 모형으로 우리나라 발전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면, 지하1층 전시관은 허물어지거나 다시 지어진 건물들의 원형 또한 그가 제작한 미니어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숭례문은 2008년 화재로 소실되기 전 깨지거나 금이 간 돌들이 사실적으로 그대로 재현돼 있다.
200분의1 축척 모형으로 제작한 흥선대원군 시절 경복궁과 광화문 사거리인 육조(六曹)거리의 모형 앞에서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당초 330여동의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던 경복궁 안의 모습이 웅장하게 펼쳐져 있다. 대부분 일제에 의해 훼손돼 1945년에는 근정전, 사정전, 수정전, 경회루, 집옥재, 향원정, 재수각, 자경전 등 8개 전각의 30여동만이 남아 있어 텅 빈 공원 같은 인상을 준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건물로 김영상 정부 시절에 폭파됐던 중앙청의 모형은 건축물로서는 뛰어났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서울역, 서울대학병원 등 많은 건축물이 그의 손에 의해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비원(秘苑)의 연경당(延慶堂) 같은 조선시대 건물은 ‘내가 바로 한국이노라’하고 소리 없는 외침을 부르짖는 것 같다. 높이 4m가 넘는 황룡사 9층 목탑은 처마 끝에 달린 풍경까지 모형건축물의 세밀한 아름다움에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지난 1일 개관한 기흥성 뮤지엄은 지하1층, 지상3층의 1관이다. 향후 1관 뒤편 강변 쪽에 2관 조성을 진행 중에 있다. 지하 전시장은 황룡사 9층 목탑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고(古) 건축물들이 전시돼 있다. 2층에는 세계 10대 고층건물과 파리의 에펠탑 등 국내외 현대식 건축물 모형이 모여 있다. 1관 길 건너편에 위치한 연구관리동에는 건축물 모형 말고도 다양한 모형들이 보관돼 있다. 항공모함, 비행기, 시추선 모형들이 전시돼 있고, 원자로 모형은 전기를 연결하면 실제와 똑같이 작동하도록 제작했다. 한쪽에는 어린이는 물론 성인들도 좋아할 앙증맞고 리얼한 미니어처 자동차들이 보기 좋게 배열돼 있다.
연구동과 연결된 집무실에는 국민훈장 동백장, 화관문화훈장 등 각종 정부 훈·포장과 상장들이 가득하다. 기네스 인증서도 보인다. 기 회장이 1993년 제작한 가로 20미터, 세로 10미터 크기의 금강산과 설악산 모형은 국내 최대 규모의 예술적 모형 제작품이 그것이다.
그의 모형 제작 인생 중 가장 심혈을 기울여 온 작품이 바로 ‘통일’에 대한 꿈이다. 황해도 옹진이 고향인 그가 모형에 통일의 꿈을 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6·25전쟁이 발발해 남쪽으로 내려온 그가 언젠가는 꼭 가야 할 고향, 그 고향의 친지와 친구들을 그리며 금강산 모형을 만들었다. 현재 수장고에 보관돼 있는 이 작품은 실내면적이 최소한 660㎡는 되어야 전시가 가능한 초대형 작품이다. 금강산은 비무장지대 철책을 지나 자연스럽게 설악산과 이어졌다.
역사를 기록하고 재창조하는 작업
“철근·콘크리트만 안 들어갔지 건축과 똑같아”
기흥성 회장은 어려서부터 손재주와 예술적 감각이 좋았다. 1965년 군 제대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모형업계의 대부였던 신교모형제작소의 우에다 사장을 만나 전문지식을 쌓았다. 우리나라에선 모형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당시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정부투자기관인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에 입사한 그는 당시 유명한 건축가인 고(故) 김수근 선생을 만나고 나서 본격적으로 모형제작에 뛰어들었다. 그는 “김수근 선생 덕분에 인생이 바뀌게 됐다. 그 분을 안 만났다면 아마 다른 사업을 했을 것”이라고 했다.
기 회장은 건국대 강사를 거쳐 국민대 교수(실내디자인 인테리어)를 하던 시절 중국 칭화대에서 연락이 와 교수로 초빙됐다. 동시통역으로 강의를 했고, 베이징에서 ‘기흥성 조형세계’ 특별전을 크게 열었다. 칭화대와의 인연으로 회사는 베이징에 진출해 중국 현지법인인 ‘북경기흥성모형유한공사’와 ‘북경기흥성전람전시유한공사’를 2003년 후반에 설립했다. 기 회장의 아들인 기현중씨가 중국 현지법인 대표를 맡고 있다.
우연히 이뤄진 성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모형건축의 달인으로 평가받고 건축조형물 부문 명인 인증을 받은 기 회장은 수많은 밤샘작업 끝에 심장병을 얻어 4차례나 심장수술을 했다. 그는 십 수 년 달아 온 심장박동기를 ‘훈장’이라고 되뇌었다.
타워팰리스 디자이너로 유명한 건축가 겸 공간디자이너인 최시영 리빙엑시스 대표도 인테리어라는 개념이 생소했던 시절 친구의 소개로 모형의 대가였던 기흥성 회장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기 회장은 “기흥성 뮤지엄은 제 50년 작품을 전시하는 것에 앞서 건축을 공부하는 후학들을 위해 지었다”고 말했다. 기 회장은 학생들에게 단순한 기술이 아닌 장인정신을 가르쳤고, 그의 사무실은 찾아오는 학생들과의 토론으로 부산했고, 그렇게 그의 정신은 양평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