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누비기 Ⅱ-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상원사 범종의 진위논란은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아 국보 재지정에 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이 범종은 신라, 중국, 일본의 삼국 범종 양식이 혼합된 전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독특한 방식이며, 더구나 제작연대가 7세기 중엽까지 올라가는 신라종의 근원으로 한국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는 주장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가섭봉과 장군봉이 남동으로 가지를 치면서 만들어진 계곡이 상원사계곡으로 상원사로부터 서북쪽 1.5㎞정도 산 중턱의 맑은 물이 흐르는 평탄한 곳에는 장군약수터와 이웃하여 윤필암 절터가 있다. 윤필암(潤筆菴)은 1950년 한국전쟁 때 모두 불에 타 폐사되었고 주변에 기와조각이 널려있어 절이 있던 자리임을 알 수 있다. 윤필암에 관해서는 고려 말의 학자 목은(穆隱) 이색(李穡, 1328~1396)이 지은 「지평현미지산윤필암기(砥平縣彌智山潤筆菴記)」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적혀있어 그 대략을 알 수 있다. “미지산에 있다. 이색이 왕의 명령으로 나옹의 부도명을 지었는데, 그 무리들이 윤필물로 치하를 드리었다. 이색은 받지 않고 폐한 절을 수리하게 하였기 때문에 암자이름으로 삼았다.”『신증동국여지승람』「지평현」불우조(佛宇條)에 적혀있는 내용이다.

윤필(潤筆)이란 붓을 씻는다는 뜻이다. 탈고(脫稿), 즉 글쓰기를 마쳤기 때문에 붓에 묻은 먹을 물로 씻음을 뜻한다. 윤필물이란 글을 써주고 그 대가로 받는 물자를 말한다. 오늘날에 비유하면 원고료와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다. 나옹의 문도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윤필물을 주었으나 받지 않고 대신 절을 수리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윤필암이라는 절은 우리나라에 7개로 모두가 이색의 윤필물로 지었다고 하니 이색의 문장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있었던 것이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가섭봉과 장군봉은 남동능선을 각각 하나씩 만들며 급하향 남동진하며 골짜기를 이룬다. 상원사가 있는 이 골짜기에 더 많은 절이 있었음이 미수 허목의 『미수기언(眉叟記言)』 「미지산기(彌智山記)」에 적혀있다. “(전략) 가섭봉 아래에는 묘덕암(妙德庵)과 윤필암이 있고, 윤필암 아래에는 죽장암(竹杖庵)이 있다. 죽장암 남쪽에는 상원사가 있는데, 옛날에 혜장대왕(惠莊大王, 세조)이 이 절에 거둥하여 도량(道場)을 중건하고 이 일을 그림으로 그리게 했는데 태학사 최항(崔恒)으로 하여금 이를 시행케 했다. 상원사 아래에 묘적암(妙寂庵)이 있는데, 묘적암 아래에는 고려 때 보리사의 탑비(菩提塔碑)가 있다.(후략)”

윤필암·상원사·보리사 등 세 개의 절 말고도 윤필암 위엔 묘덕사가, 윤필암 아래엔 죽장암이 있었다고 하니 이 골짜기에는 모두 5개의 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죽장암에 대하여는 목은 이색이 쓴 「지평현미지산죽장암중영기(砥平縣彌智山竹杖菴重營記)」가 있다. 1379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진 이 중영기는 1478년(성종 9) 성종의 명으로 서거정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우리나라 역대 시문선집 『동문선(東文選)』에 들어있다.

"(전략) 흔적도 알기 어려운 죽장암은 개현(開峴) 승(僧)님으로 인하여 암자에 머물면서 도를 깨달은 자가 있었으나 이름은 알 수가 없으며 왕으로부터 대나무 지팡이를 하사 받고 죽장암이라 하였으며 왕은 죽장암 편액(扁額)을 내렸다고 한다. 암자가 높은 곳에 있어 용문산 심장에 있다하면 상원사는 무릎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나무가 울창하여 앞을 굽어보면 치악산(雉岳山)과 여강(驪江, 남한강의 애칭)이 손바닥 가운데 있는 듯하고 산봉우리들이 나직히 읍(揖)을 하는듯하여 온화하며 사시(四時)의 경치가 어두웠다 밝았다 하는 변화무쌍한 곳이다.(중략) 조각구름과 나는 새가 한 결 같이 만리에 푸르며, 산은 병풍 같고 강은 비단을 펼쳐 놓은 것과 같이 좌우에서 밝게 비추어 안계(眼界)가 확연하고 마음속이 환해져서 의심나는 것이 모두 없어진다. 이것을 병에 비유한다면 능히 걷지 못하던 자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며, 힘이 없던 자가 지팡이를 짚고 튼튼해지는 것과 같으니, 경치로 인하여 마음이 생기고 마음으로 인하여 도가 드러나 힘을 써야 할 바에 저절로 묵묵히 들어맞게 된다. 더구나 대나무가 속이 비어 칼만 대면 쪼개지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내가 이 암자를 다시 짓는 까닭이다.(후략)”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가진 곳에 다시 지었다는 죽장암은 또 다시 그 흔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가섭봉아래 묘덕암, 상원사 아래에 묘적사는 기록(허목의 미지산기)에만 존재하는 절이니 이 또한 다른 수수께끼이다.

용문산의 주봉으로 크나큰 산체(山體)를 자랑하는 가섭봉의 웅대함과 유심함을 눈으로 느낄 수 있는 곳. 거꾸로 보면 아름다운 주변 경치를 사시사철 느낄 수 있는 곳, 이곳이 바로 한 계곡에 5개의 절이 들어섰던 이유였을까. 이색의 미지산중영기를 되뇌어 보니 용문산의 주봉 가섭봉 남동쪽 전체의 모습을 부처님으로 보았다는 생각에 이른다. 죽장암이 있는 곳은 부처님의 심장, 상원사는 무릎, 치악산과 여강은 손바닥 안에 담은듯하고, 부처님을 향해 절하는 산봉우리들은 중생? 맞는다면 용문산 가섭봉의 남동은 부처님으로 귀결된다.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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