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누비기Ⅱ-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용문산의 높이는 해발 1157m로 경기도에서 4번째로 높다. 백두대간의 오대산 두로봉에서 남서쪽으로 가지를 처 뻗어나가는 하나의 산줄기는 계방산, 운두령, 태기산, 오음산 등을 지나 양평과 강원도 홍천·횡성의 경계가 되는 금물산에 이르고 갈기산~신당고개를 지나 용문산을 높이 들어 올리고는 마유산 등을 지나 두물머리에 이르는 이 산줄기를 한강기맥이라고 한다.

용문산은 경기도에서 4번째로 높긴 하지만 19개의 봉우리를 거느린 산군으로 매우 넓으며 높고도 크다. 골짜기 또한 깊고 험하다. 1899년(광무3) 발간된 <양근읍지>는 용문산을 ‘웅반고대(雄盤高大) 유심중조(幽深重阻)’라 기록했다. 용문산의 주봉인 가섭봉은 동서 8㎞,남북 5㎞에 걸칠 정도로 산체(山體)가 웅대하지만 거느린 산군들이 앞과 주위를 가려 산체의 위용을 사람의 눈으로 바라만 보아서는 느끼기 어렵다.

금물산으로부터 남서진하며 달려온 한강기맥의 산줄기는 용문산군인 싸리봉, 단월산, 문례봉(일명 폭산)을 지나 용문산 최고봉인 가섭봉에 이른다. 가섭봉에서는 북동쪽으로 봉미산을 비롯한 산줄기가 이어지며, 남서쪽으로는 장군봉, 함왕봉, 백운봉 등을 잇는다. 이렇게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가섭봉과 장군봉의 남동쪽 능선의 아랫마을이 용문면 연수리인데 연수리는 연안리와 장수동을 합해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붙여진 지명이다. 연수리는 농촌체험마을인 ‘양평보릿고개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마을에서는 가섭봉의 웅반고대함과 유심중조함을 보며 느낄 수 있다. 지금은 연수리에서 오촌리를 연결하는 용문산터널이 뚫리고 도로가 확·포장되어 교통이 좋아졌지만 그 이전에는 그야말로 용문산 가섭봉 남동쪽의 심심산골이었다.

유심중조한 깊은 산골이지만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있는 특별한 곳이다. 첫 번째 수수께끼는 고려우왕의 유모 장씨의 묘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다. 장씨는 우왕의 특별한 배려를 등에 업고 현실정치에 크게 관여한 여걸이었다. 장씨의 묘를 이곳에 쓴 것은 그녀의 고향이 지평(砥平)이었기 때문이다. 우왕이 광주에 속하도록 강등시켰던 지평에 감무까지 두도록 특별대우를 했던 것만 보더라도 그녀의 힘을 짐작할 수 있다. 보리사의 뒷산에 썼다던 묘는 물론 남아있지 않으니 전설에 불과한 것일까.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이 마을에 존재했던 보리사(菩提寺)다. 조계종의 대표적인 사찰로서 보리갑사라고도 불렸으며, 자복사(資福寺)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큰 절이었던 이 절은 지금도 계단식으로 쌓은 석축이 남아있고 기와조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남아있는 석축 등으로 보아 전체적인 규모가 매우 컸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 절터를 지키던 승탑(부도)(僧塔:대경대사 승탑으로 추정, 보물 351호)과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 보물 361호)가 각각 1913년과 1914년 일제에 의해 서울로 옮겨져 지금은 석축과 와편 등만이 이곳이 절터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미수 허목(眉叟 許穆,1595~1682)은 미수기언(眉叟記言)의 미지산기(彌智山記)에 ‘상원사 아래에 묘적암(妙寂庵)이 있는데, 묘적암 아래에는 고려 때 보리사의 탑비(菩提塔碑)가 있다’라고 적었으니 이미 1600년대 이전에 절은 없어지고 탑비 등만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언제 창건되었고 왜 없어졌는지 모르는 절이다. 고려태조의 국정자문이었던 당대의 고승 대경대사 여염이 말년에 주석하다가 생애를 마친 곳이니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고려우왕의 유모 장씨는 죽어서도 고향으로 돌아와 묻힐 만큼 큰 세도가였는데 그 묘 자리가 보리사의 뒷산이었던 것은 그저 우연이었을까.

연수리에서 용문산터널로 이어지는 2차선 도로의 보릿고개마을의 연안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조금 진행하다가 다시 우회전하면 수득골길이다. 근년에 선운사라는 작은 절이 들어서있는 보리사터 앞을 따라 난 상원사길을 따라가면 상원사입구가 나타난다. 연수리에서 상원사를 지나 장군봉과 가섭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이기도 한 절 입구를 지나 오르막길을 가면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유서 깊은 상원사에 다다른다.

태고 보우가 이 절에 머물며 수행했고, 효령대군의 원찰이 되었으며, 무학도 왕사를 그만둔 뒤 이곳에 와 머물렀다. 1462년 세조가 이곳을 직접 거둥하였을 때 법당위로 누런빛이 하늘에 올라 백의관음으로 화현하자 최항으로 하여금 그때의 모습을 기록하게 한 ‘관음현상기’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그 후 1907년 정미의병 봉기 때 의병의 소굴이라 하여 일본군이 불을 질러 겨우 법당만 남게 되었다. 이후 신축했으나 6·25전쟁 때 용문산전투를 겪으면서 다시 불에 타 없어졌다가 차츰 복원되어 오늘의 모습을 하게 됐다.

절에 들어가는 돌계단을 올라서면 왼쪽에 있는 종각에 낡은 범종이 걸려있다. 이 범종은 상원사범종으로 1907년 일본군에 의해 절이 불에 탄 이듬해 서울로 옮겨져 1929년 첫 재야의 종으로 타종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몇 차례 자리를 옮긴 것은 고사하고 위작논란에 휩싸여 국보로 지정되었다 해제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외출 103년만인 2010년에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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