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누비기-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극심한 찜통더위에 유례없는 늦더위, 10월 태풍까지 기상이변이 계속되었지만 가을은 변함없이 제자리를 찾아왔다. 형형색색의 오색 단풍이 산하를 물들이며 황금빛 들판과 높고 푸른 하늘, 국화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가을의 상징으로 우리 곁에 다가왔다. 가을의 상징이 어디 그것들 뿐이랴 마는 억새도 가을의 상징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억새는 그 이름에서 ‘억세다’, ‘억센 풀’이라는 느낌을 불현듯 들게 한다. 줄기와 잎이 억세고 질겨서라는데 이름속의 ‘새’가 억새를 뜻한다고 하니 이 풀의 억셈을 한 번 더 강조한 셈이다. 대수롭지 아니하게 생각하였던 상대에게 뜻밖의 손해를 보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뜻으로 ‘억새에 손가락(자지) 베었다’는 속담이 있다. 실제로 억새 잎은 길이가 40~70㎝이고 폭은 1~2㎝로 끝으로 갈수록 좁아지며, 잎 가장자리는 미세한 톱날처럼 날카로워 거꾸로 접촉하면 사람의 피부가 쉽게 베어진다.

갈대는 억새와 혼동하기 쉬운데 갈대는 주로 물가나 습지주변에서 자라며 가을이 되면 색깔이 갈색에 가까워 쉽게 구별된다. 최근 들어 환경에 관한 관심과 함께 갈대와 억새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둘 다 오염물질을 흡수하여 물을 깨끗이 정화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뿌리가 질기고 강해 비 등으로 인한 겉흙의 파임을 막아 하천변이나 절개지 등에 많이 심는 추세이다.

억새가 왕릉 봉분의 사초(莎草,산소에 흙을 붙여서 뿌리째 떠낸 잔디, 즉 떼를 입히어 잘 가다듬는 일 또는 그 떼)로 쓰인 특별한 경우도 있다.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승하하면서 고향인 함흥에 묻히길 원했으나, 유명(遺命)을 따르지 못한 아들 태종 이방원(李芳遠)이 그곳의 억새〔그 고장 이름으로 청완(靑薍)〕로 건원릉의 봉분을 조성하였던 것. 다른 능들의 봉분은 5월부터 9월까지 여러 차례 깎지만, 건원릉의 봉분은 ‘청완예초의(靑薍刈草儀)’라 하여 한식날 단 한 차례 지난해에 자란 억새를 예초(刈草, 풀베기)한다.

억새가 가을의 상징 중 하나로 정착한 이유는 민둥산억새꽃축제, 산정호수 명성산억새꽃축제, 서울억새축제, 제주억새꽃축제 등등 전국의 유명 억새관련 축제가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억새는 1~2m 정도 자란다. 키가 2m되는 억새라면 꽃대가 나오기 전까지는 잎이 1.1m 정도이고 나머지 0.9m 정도는 가느다란 꽃대와 이삭의 길이이다. 억새의 꽃은 꽃대 끝에 산방꽃차례로 9월에 피는데 이삭전체는 10~30㎝ 길이로 씨앗이 여무는 10월이 되면 길이 4.5∼6㎜의 작은 이삭이 노란빛을 띠며 바소 모양에 길고 짧은 자루로 된 것이 쌍으로 달린다. 밑동의 털은 연한 자줏빛을 띠고 길이 7∼12㎜다.

꽃이 지고 종자가 여문이후 작은 이삭은 노란빛을 띠지만 털북숭이모양의 이삭전체를 보면 보드랍고 뽀야며 빛을 받으면 떡에 기름을 발라놓은 것처럼 윤기가 난다. 살랑바람이라도 불면 가늘고 긴 꽃대가 바람결을 따라 휩쓸리는 모습이 이채롭고 유별나다. 종자가 늦가을이 되어 바람결을 따라 털과 함께 멀리 날아가 앉으면 거친 생육환경에서도 잘 번식하지만 토질이 비옥하고 교목만 울창하지 않으면 뿌리로도 왕성하게 번식하기 때문에 흡사 드넓은 보리밭이나 밀밭처럼 억새밭으로 만들어버린다. 10월 중하순인 지금쯤 가장 멋지고 아름답게 보일 때를 맞추어 축제를 여는 것이다. 따라서 꽃이 이미 지고 난 이후 요즘 여는 ‘○○억새꽃축제’와 같이 ‘억새꽃’이 들어가면 맞는 말이 아니다.

마유산(馬遊山, 864m, 유명산)은 양평과 가평의 경계가 되며 정상부근의 남쪽 사면인 양평군 쪽은 비교적 완만하고 평활한 육산이다. ‘말이 노는 산’이란 뜻의 이 이름은 정상부근의 완만하고 평활한 넓은 초원이 말을 기르기에 알맞은 조건들을 갖추어 예전에 말을 방목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여지도는 물론 산경표(山徑表), 고지도나 양근군 읍지 등에도 기록되어있다.

말이 뛰놀던 이곳 23만1400㎡(약 7만평)를 1970년대 한때 밭으로 만들어 고랭지채소를 재배했다. 농장을 그만두자 무, 배추 대신 억새가 이 땅을 차지하여 푸른 억새초원이 되었다. 용문산군에 속한 산들과 은빛으로 반짝이며 유유히 흘러내리는 남한강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산하, 초원에서의 막힘없는 전망은 이곳에서만 즐길 수 있는 풍광이다.

차로는 옥천면의 백현사거리에서 용천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경사와 굴곡이 심한 2차선 도로가 1차선으로 바뀌고 이내 다다르는 배너미고개에서 좌측으로 난 임도로 쉽게 오를 수 있다. 등산을 겸한다면 백현의 상수도가압장에서 편전산~대부산 등산로로 오르거나, 국도 37호선 한화리조트양평입구와 농다치고개 사이에 있는 등산로를 통해 올라도 된다.

한때 최고의 화제작이던 영화 ‘관상’의 촬영지이기도 한데 페러그라이딩활공장, TV드리마세트장과 ATV(산악오토바이)체험장이 있어 너른 초원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양평의 숨겨진 명소다. 곱게 물든 단풍과 함께 높푸른 하늘, 따사로운 가을햇빛을 받아 눈이 부시도록 윤기 나는 억새가 불어오는 바람결에 파도처럼 물결치며 일렁이는 가을 장관을 쉽게 즐길 수 있음은 양평사람들에 주어진 또 하나의 행운이다.

〔본지 지난호(2016. 10. 20, 제215호) 본란 ‘지역의 역사 새로 쓰다’ 제하의 글에서 제1회 양평부추축제를 찾은 연인원은 2만여명이었다고 축제추진위원회에서 알려왔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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