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옥 시인

안정옥 시인

사람의 몸에서 가장 부드러운 부분이 뇌라고 한다. 수 만개의 다른 신경세포와 연결된 엄청난 양의 신경세포들이 서로의 의사나 감정, 생각들을 주고받는 일을 도맡아서 한다. 단지 뇌의 주인에 따라 굳어있거나 말랑말랑한 상태로 변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공기 없이 몇 분 동안은 견딜 수 있고, 물 없이 얼마간은 버틸 수도 있으며, 별생각 없이 멍청하게 몇 년을 그럭저럭 보낼 수도 있다 한다. 그만큼 뇌는 편안한 걸 좋아하고 게으른 걸 선호한다. 그러니 쉬지 못하게 일으켜 세워 귀찮을 정도로 건드려, 그 콧속에 복사꽃 향기를 듬뿍 부어줘야 할까.

매일매일 새로운 지식들이 얼마나 많이 쏟아져 나오는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어렸을 적 읽고 쓸 줄조차 몰랐지만 순박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던 그 사람들 다 어디로 갔을까. 그건 다 아주 오래된 일, 21세기의 문맹은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제까지 배운 것들을 잊고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학자의 견해도 나왔다

북 카페 상호가 ‘조르쥬 상드’니까 누군가는 웃음을 터트리며, “어떻게 연애박사를….” 우리는 너무 경직된 고정관념에 홀리고 있다.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무의식중에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다. 나 역시 사람들의 추문을 즐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만일 가수라면 나는 그의 노래를 반복하여 더 열심히 들어본다. 그가 작가라면 그의 책을 세심히 읽던지 아니면 그의 어린 시절까지 유추해 보며 그렇게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내 마음대로 그 소문의 뿌리를 헤아려보곤 한다. 상대에 대한 문제보다는 그 안에서 나의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타인의 고정관념을 오히려 노래 자신의 뇌에 거역하는 첫 번째 행위가 아닌가.

‘작가의 가장 소중한 자산은 불행한 어린 시절’이라고 말한 헤밍웨이처럼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예술가가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 조르쥬 상드 역시 그랬다. 본인의 이름 ‘오로르 뒤팽’은 어느 소설책에서도 활자화되지 않았다. 당시엔 여성의 이름으로 책을 내주는 출판사가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212년 전의 일이다. 지금으로 치면 베스트셀러, 1년에 몇 권의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런 저력은 대체 그녀의 어디에서 나와 주는 건가. 90편의 소설과 산문집, 서간집 250편을 남기고도 틈틈이 연애까지 했다고 하니 무서운 힘이 부럽다. 그 당시의 화려한 남성편력은 크게 문제가 되진 않고 다만, 남자들의 권위에 말이나 글이 아니라 행동으로 도전했다는 사실이 더 문제가 되었다 한다. 외출할 땐 남성복을 입었으며 여성들이 들어갈 수 없는 장소에도 스스럼없이 출입했다. 공공장소에서도 거침없이 줄담배에다, 그것도 굵직한 시가를 피워 물었다.

‘나 죽거든 사랑하는 이여, 내 무덤 위에 버드나무를 심어다오 그늘 드리운 그 가지를 좋아하노니 창백한 그 빛 정답고 그리워라 내 잠든 땅위에 그 그늘 사뿐히 드리워다오’라고 쓴 묘비명 아래 잠든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 조르쥬 상드와 2년 동안 열애를 했던 천재 시인, 그때 쓴 <회상>이라는 시는 낭만파 시대의 3대 사랑시의 하나다. 상드는 뮈세를 버리고 쇼팽에게 갔다. 그와 함께 지내는 동안 가장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다 한다. 둘의 사랑은 플라토닉러브였다는 것이 정설. 쇼팽의 병이 상당히 악화된 상태에서 만났지만 주옥같은 곡들이 그때 나왔고 상드 역시 그때 대표작들을 발표했다.

몇 백 명의, 아니 그 이상이다. 누구는 2000명의 남성들이 주위를 맴돌았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단지 예술적인 동료였을 것이다. 어쨌든 조르쥬 상드는 공공연히 자신의 연인을 공개했다. 겉모습과 달리 여성적인 성격의, 모성애가 깃든 정신적인 관계가 대부분이었다. 연인에게는 모든 것을 다 쏟아 붓는 불꽃같은, 그가 뮈세에게 준 예술적인 영감과 쇼팽에게 퍼부은 거침없는 사랑, 혹은 감동들이여, 예술가로서 상대가 남자건 여자건 조르쥬 상드 같은 이를 만나 영감을 받을 수 있다면, 불멸의 작품 한편 남길 수 있다면, 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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