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인터뷰> 기타리스트 신대철
전국 돌며 토크콘서트 열어
음원 수익 분배구조 이슈화
‘옳은 일’이면 그대로 실천
플랫폼창동61 뮤직디렉터…
문화소외지역을 중심지로
‘기타의 신’이라 불리는 사나이, 신대철씨를 인터뷰한다고 하자 주변 록 마니아들이 죄 난리였다. 따라가겠다, 어쩌겠다는 등… 그들의 성원이 높을수록 부담감도 높아졌다. ‘나는 저분의 음악을 잘 모르는데 인터뷰하는 게 실례가 아닐까?’ 걱정하며 인터뷰를 준비했는데 그를 알아갈수록 정말 멋지다! 부담감이 기대감으로 바뀐다. 현재 바른음원협동조합(이하 바음협) 이사장과 플랫폼창동61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신대철씨를 그가 종종 들른다는 용문면 덕촌리 제로제(SEEROSE) 커피하우스에서 만났다.
- 양평에 오신 지 7년 되셨지요. 오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큰 애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직전인데요. 사실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학교 교육에 그다지 찬성하지 않아서 아내랑 고민하면서 조사하다가 조현초등학교를 찾아냈어요. 그래서 급하게 이사 왔습니다. (만족스러우신가요?) 굉장히 만족합니다. 전에 해 본적 없는 텃밭도 가꾸고, 사다 심은 작은 나무가 자라는 걸 보며 놀라기도 하고… 일어나면 공기가 좋잖아요. 숨 쉴 때 상쾌하다 느끼는 거, 꽃냄새나 꽃향기 같은 전에 알지 못한 새로운 것들을 느끼게 되어 좋아요. (‘이건 너무 힘들어!’하는 건요?) 일 때문에 매일 서울로 오가는데 이동거리가 너무 멀어서 불편하죠. 뭔가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는 포기해야 되는 거죠.”
- 자녀를 위해 양평까지 오실 정도면 참 좋은 아빠인 것 같아요.
“애들한테 더 좋은 환경이었으면 좋겠다, 흙을 밟고 자라면 좋겠다 싶었어요. 저는 도시에서 나고 자라서 흙을 밟아볼 기회가 거의 없었거든요. 사실 서울에서 산다는 자체가 굉장히 삭막하잖아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사는 게 그리 좋아보이지도 않았고, 아스팔트길보다 흙을 좀 걸어보는 게 인간적이고 나중에 사는데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사실 다 그런 생각이 있지만 그럴 용기가 없어 못하는 거죠.”
- 올해가 시나위 데뷔 30년인데 개인적인 감회가 있으시다면?
“글쎄요. 저는 몇 년 기념하고 그런 거에 감흥이 없어요. 저는 별로 생각을 안 했는데 주위에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해야 되나, 30주년 기념음반이나 이런 걸 좀 해볼까 고민을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다들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보면 서로의 요구 조건들이 있는데 그걸 다 충족시키기가 쉽지 않아요. 그렇게까지 어려운 걸 굳이 내가 해야 하나… 지금은 계획이 없어요.”
- 시나위의 상징은 신대철씨인데요. 기타도 치고 보컬도 해볼 생각은 없으셨어요?
“어렸을 때 처음 음악을 접하고 음악을 배우고 기타 연습했던 시절, 히어로라고 생각했던 유명한 기타리스트가 있어요. 그들을 동경하다 보니 기타를 치게 됐거든요. 실제 노래를 해보려고 한 적도 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자신도 없고. 역시 뭐 하나를 얻으려면 뭐 하나를 버려야 하더라고요. 기타리스트로서 확고한 입지를 만들고 그런 게 저는 좋았던 것 같아요.”
- 신대철씨 이름만 알다가 2013년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을 위한 공연 기사를 보고 반했습니다. 음악 말고 사람보고 팬 해도 기분 나쁘지 않으시죠? 그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질문하시는 거 보니까 이전에 저를 전혀 모르던 분이었다는 걸 알겠어요.(웃음) 어느 날 기타리스트만 출연하는 공연제의를 받았어요. 재미 있겠다하고 한 거죠. 이전에 기타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한 콜트 기타 사건은 알았지만 그 공연을 주최한 콜텍문화재단과의 연관성은 몰랐어요. 공연을 며칠 앞두고 페이스북에 공연 홍보를 했는데 ‘이 공연은 아닌 거 같다’는 댓글과 메시지가 오더라고요. 무슨 말인지 싶어 들어가 보고 이게 거긴 걸 알게 됐죠. 굉장히 난감한 상황이었죠. 그때부터 댓글이 초토화되고 굉장히 욕을 많이 먹었어요. 그래서 해고 노동자분들을 만나서 ‘죄송하지만 이번 공연은 욕을 먹더라도 할 수 없이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후 당신들을 위한 공연을 하겠습니다’라고 사죄드렸죠. 이후 공연을 하고 좀 시간이 지난 다음에 홍대 극장을 빌려 콜트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공연을 했죠. 나중에 그쪽에서 초청해주셔서 또 한 번 공연을 했죠.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안 했을 거예요, 진짜! 그런 실수 아닌 실수를 하게 되서 그분들을 알게 되고 그분들을 위한 의미 있는 공연도 했으니 그것도 나름 좋은 인연이 된 것 같고… (잘 마무리가 되었네요?) 네, 잘 마무리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좀 안심이 된다 그럴까.(웃음) 나중에 해직노동자 단식투쟁할 때도 찾아가고… 이런 이야기를 하려니 민망하네요.”
- SNS에서 사회적 발언과 참여도 많이 하시는데 주변에서 말리지 않나요?
“주위에서 많이 말리죠. 팬들도 별로 안 좋아해요. 너무 오지랖이 아니냐. 그런데 말을 할 수 있을 때 해야지, 정권 최고 권력자도 때 되면 다 물러나야 되잖아요. 잠시 동안 갖고 있는 권력인데 남용하고 엉뚱한 짓 하는 걸 그때그때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 건 그야말로 비겁하다… 그런데 그것 때문이라기보다 약간 반골기질 때문에 그런 거죠.”
- 아버지 신중현씨와 동생(석철, 윤철)들도 다 음악을 하는데요. 가족들이 모이면 뭐 하시나요? 혹시 잼(jam·즉흥연주)?
“연주 안 해요. 그런 거 안 해요. (강한 어조로)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건 제 직업일 뿐이에요. 무대 위의 삶과 무대 밑의 삶은 달라요. 무대 밑에서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배고프면 밥 먹고, 급할 땐 화장실 가고 똑같아요. 욕구 충족을 위해 노력하고… (그래도 직업이 같으니까 음악이야기를 하지 않나요?) 서로를 너무 잘 알아 할 얘기가 없죠. 뭐하는지 뻔히 아니까. 그거에 대한 프로세스를 너무 잘 아니까 서로가 궁금한 점이 없어요.”
- 1996년 KBS 빅쇼 공연에서 아버지와 연주하시는 걸 봤습니다. 다른 인터뷰에서 ‘아버지와의 공연은 부담스럽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행복하지 않나요?
“행복은 결과로서의 심리적 상태고요. 그걸 준비하는 과정은 결코 행복하지 않죠. 결과가 행복하면 다 행복하게 느껴지죠, 항상. 유명한 시상식에서 대상을 탔다 그럼 그때는 정말 행복하겠지만 그 과정까지 얼마나 험난하고 힘들었겠어요. 행복이라는 건 정말 결과로서 느끼는 감정이지 행복을 느끼기 위해 수많은 고통을 느껴야 하는 게 사실이거든요. 행복한 순간은 짧고 고통은 길고. 그래도 행복감을 느꼈을 때 희열은 모든 걸 압도하니까요.”
- 인터뷰집 <뛰는 개가 행복하다>에서 ‘음악이라는 게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걸 하기도 하고 내가 좋아야 하는 걸 하기도 한다.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고 말씀하신 걸 보았습니다. 뭣이 중헌지 알고 멋있게 나이 드시는 것 같습니다.
“앗! 고맙습니다. 최근 더 많이 느끼는 게 우리는 대세를 따르는 게 있어요. 다른 길을 걸으면 비웃음을 사기도 하고, 쟤는 왜 저래 하고 존중받지 못하죠. 선택의 문제를 선악의 구도로 몰고 가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꽤 많은 것 같아요. 저기 뒤에 보시면 옛날 LP판이 있잖아요.(카페 한쪽에 옛날 LP판들이 전시돼 있다) 척 맨지오니, 쳇 베이커, 엘라 피츠제럴드 등 수십 년 전 사람들인데 아직까지 음반들이 남아 있잖아요. 굉장히 의미 있는 뮤지션들이거든요. 요즘같이 이틀이면 사라지는 빠른 음악 사이클 안에서는 저런 걸 만들기 어렵죠. 어떤 자주성과 의식을 가지고 돈이 안 되도 만드는 의미 있는 제작자와 그런 거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뮤지션들도 필요해요. 상업적인 걸 배격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대세니, 그것만 해야 된다는 게 잘못됐다는 거죠. 그것도 하면서 한쪽에서 의미 있는 걸 만들어야죠.”
- 음악 생태계를 바로 세우기 위해 2014년 8월 바음협을 만들고 이사장을 맡으셨는데요. 바음협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우리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와 IT산업 발달로 인터넷망이 전국적으로 깔리면서 음반업계가 망했죠. 사람들이 ‘아직도 돈 주고 음악을 사냐?’ 이러면서 더 이상 음반을 사지 않는 거죠. 피지컬 음원들이 퇴출되면서 2004년 멜론이 등장했죠. 멜론이 내세운 논리가 불법 공유사이트를 이용하고 무료 다운로드를 받던 음지의 사람들을 양지로 끌어내겠다는 거였어요. 훌륭한 얘기잖아요. 그래서 음반업계가 다 사인을 했죠. 전부 디지털 시장으로 옮겨오는데 3000원 정도 정액가로 모든 음악을 다 들을 수 있는 저가시장이잖아요. 그 순간부터 음악은 세상에서 가장 싼 물건이 됐죠. 음악을 만들어 지속가능한 삶이 불가능해졌어요. 그런 세월이 10여 년간 지속되었죠. 그러다 이젠 모바일 통신사의 부가서비스 정도가 됐어요. 예전에는 독립 산업이었는데 지금은 종속 산업이 된 거죠. 그래서 ‘이걸 그냥 지켜만 보고 있을 거냐. 대기업들에게 문제제기를 할 수 있지만 달라지는 게 있냐. 바뀌지 않을 거다’는 생각하게 됐고, 뭔가 행동으로 나서서 그들이 하지 않는 어떤 걸 해보자 해서 시작하게 된 게 바음협이죠.”
- 지금 진행상황은 어떤가요?
“음악 유통 플랫폼을 새롭게 한번 만들어보자고 겁 없이 덤볐는데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자본이 필요하더라고요.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없을까 찾다 사람들이 아직 잘 모르는 신기술을 알게 됐어요. 이걸 잘 접목하면 새로운 어떤 유통 시장을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어요, 저는 지금은 뭐다 라고 밝히긴 어렵고요. 좀 기다려주시면 짠하고 한꺼번에 내놓겠습니다.”
- 최근 ‘음악과 라이프스타일이 융합된 복합문화공간’ 플랫폼창동61 음악디렉터까지 맡으셨던데 몹시 바쁘시겠어요.
“크게 별다르게 하는 일은 없어요. 가만 앉아 있으면 돼요. ‘어 왔니?’하고… (얼굴 마담? 잘 생기셨으니까?) 아니 바지사장이요! 흐흐. 2020년 완공목표로 서울 창동에 아레나가 들어가요. 한 2만명 들어가는 초대형 공연장이 생기는데 문화적으로 소외돼 있던 동북 4구에 갑자기 대형 공연장이 생기면 생뚱맞잖아요. 그 전에 뭔가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 해서 첫 번째 만든 게 플랫폼61이에요. 컨테이너 박스 61개로 만든 공연장, 레스토랑, 패션숍 등인데 창동역 바로 앞에 있고요. 조금씩 하는 게 많다보니 뭘 하는지도 모르겠지만(웃음) 크게 하는 일은 이 두 가지 정도에요. 바음협 사무실도 이전해서 같은 공간 안에 있어요.”
- 지역사회 운동에 참여하실 의향은 있으신지요.
“기회가 되면… 밖에서 하고 있는 일이 너무 많아가지고 제가 주말에 잠깐 집에 있어요. 주말에도 뭘 하면 숨을 잘 못 쉬겠더라고요. 좋은 기회가 있다면 한번….”
- 음악인 신대철 말고 인간 신대철로서 이루고픈 꿈, 소소한 소망이 있다면.
“지금은 바음협 음악 플랫폼 만드는 거 이외엔 잘 생각나는 게 없어요. 아 저런 건 있어요. 음악가로서 정말 역사에 클래식으로 남을 만한 음반, 교과서가 될 만한 음악은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요. 능력이 될지 모르겠네요. 그러려면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러기가 정말 힘들어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을 우선 만들어 놓고(웃음), 나이가 들면 스타는 하기 힘들지만 아티스트는 나이가 들어서도 할 수 있잖아요. 젊어서보다 음표수는 줄어들지만 깊이 있는 뭔가를, 익은 음악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면 그런 거 해 보고 싶어요.”
자신의 실수에 반성하고 새로운 음악으로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게 “그게 뭐니?”하고 말 걸기 하는 선배. 음악 하는 후배들의 장례식장에 가면 통곡하며 운다는 그가 음악생태계를 바로 잡기 위해 평생 입을 일 없던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맸다. 후배들이 음악을 하면서도 삶을 지속해갈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기 위해, 더 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신대철식 사랑법이다. 신대철이라는 큰 나무가 내어준 그늘 아래 지친 후배들은 쉼을 얻고 힘을 얻어 가리라. 모든 음악에는 뮤지션들의 피땀이 들어있다. 하지만 지금의 음악 유통구조에서는 음악으로 먹고 살기 힘들다. 돈 되는 음악 속에 가려진 보석 같은 뮤지션들과 대기업의 횡포와 맞서 싸우는 신대철에게 더 깊은 관심과 지지를 보냈으면 좋겠다. 그리고 따뜻한 정의가 승리하는 날을 함께 목도하고 기뻐했으면 좋겠다. 꼭 그랬음 좋겠다!
이경희 객원기자는 소싯적 의상디자이너, 출판기획편집자, NGO 홍보팀장으로 일했다. 경남 산청 시골 출신이라 서울서 늘 흙을 그리워했다. 5년 전 양평으로 이사해 놀멍쉴멍 글도 쓰고 책도 만들며 남편과 두 딸 아이와 지지고 볶으며 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