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인터뷰> 영화 ‘귀향’ 개봉한 조정래 감독

7만5000명 후원으로 제작… “보는 것이 마지막 후원”
양수리 살면서 영화제작… 어떤 장면이 양수리? 찾아봐!

 

 

▲ 영화 <귀향> 포스터

지난해 말 우리 정부가 일본 정부와 위안부 합의를 했다. 피해자들이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며 1992년 1월8일 시작한 수요집회는 2월말로 1219회에 접어든다. 그런데 정부가 일본에서 10억엔을 받는 대가로 불가역적, 즉 다시는 법적 책임을 포함해서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다고 합의한 것이다. 정작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는 단 한 번도 의견을 묻지 않고서 말이다. 2016년 ‘병신년’을 제대로 이름값 하며 시작했다.
1000번이 넘는 수요집회에 겨우 한 번밖에 못 간 게으른 발걸음이었지만 말 같잖은 합의 소식에 있는 대로 열불이 났다. 나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속이 양은냄비마냥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런데 10년도 더 전부터 이 할머니들이 살고 계신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에 봉사하러 다니며 영화를 준비하던 한 청년이 있었다. 강일출 할머니의 ‘태워지는 소녀들’ 그림을 보고 영화제작을 결심한 이후 이 청년은 강산이 변하는 동안 시나리오를 쓰고 투자자를 만나고 영화 준비를 했다. 속이 괴로우면 할머니들을 찾아뵈면서 속을 달래고 그렇게 10년을 기다린 청년.
누군가 그랬다. 한 가지 일을 10년 이상한 사람은 그 일을 논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양은냄비는 라면에나 제격이지 깊은 맛을 우려내지는 못한다. 영화 <귀향>을 찍은 조정래 감독은 양은냄비들이 입과 손가락으로 구호를 외칠 때 무쇠 가마솥 마냥 위안부 문제를 우려냈다. 그 진국이 바로 영화 <귀향>이다. 딱 보기에도 진국처럼 보이는 그는 북한강과 남한강, 두 큰 물이 만나는 양수리에 산다.

 

▲ 딱 보면 순박한 청년의 얼굴인데,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온 것일까? 한 작품에 꽂혀 14년을 매달리고, 결국 7만5000명 후원자의 마음을 얻어 스크린에 올리고 마는 저력. 재주가 아니라 공감력과 우직함의 힘이라고 조정래 감독의 얼굴에 쓰여 있다.

-양수리에 언제 이사 오셨나요?

“햇수로 3년 됐습니다. 군 생활도 양평에서 하고 워낙 양수리를 좋아해서 이사 오기 전에 사무실이 양수리에 있었습니다. 서울 전셋집 보증금이 너무 오르기도 해서 양수리로 이사 왔습니다. 그런데 양평에 오면서 영화일이 바빠져 요즘은 양평에 잘 못 들어오고 있습니다.”

-2012년 판소리 영화 <두레소리> 시사회에서 첨 뵈었습니다. 판소리랑 깊은 인연이 있는 걸로 압니다.

 

“현재 판소리 고법 이수자이고 판소리 창작모임 ‘바닥소리’ 멤버입니다. 영화 서편제를 보고 판소리에 깊이 심취하게 되었습니다. 뒤늦게 정식으로 배우면서 고수가 되었습니다. 고수와 영화감독 투잡을 뛰고 있습니다. 거의 고수로 돈을 벌어 영화에 돈을 대는 거죠.(웃음)”

-영화 <귀향>의 제작과정이 감동스토리라고 들었습니다.

“2002년 ‘나눔의 집’(위안부 할머니 후원시설) 봉사활동을 하면서 피해 할머니들을 처음 만났습니다. 강일출 할머니가 미술심리치료 과정에서 그리신 ‘태워지는 처녀들’을 보고 충격을 받아 영화 제작을 결심하고 시놉시스를 썼습니다. 이후 제작자를 찾았지만 숱하게 거절당하면서 제작이 무산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포털과 영화 홈페이지 등을 통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크라우딩 펀딩’ 덕분에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7만5000명이 넘는 후원자들이 순 제작비 중 50%가 넘는 12억여원을 모아주셨습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분들이 후원해주셨는데 이분들 명단이 엔딩 크레딧으로 약 10분에 걸쳐 나옵니다. 그렇게 힘겹지만 감격스럽게 14년 만에 영화가 나왔습니다.”

▲ ‘나눔의 집’ 미술심리치료 과정 중 강일출 할머니가 그린 <태워지는 처녀들>. 자료=나눔의 집

-이쯤 되면 국민영화로 불러야겠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후원하신 영화가 처음이라고 들었습니다. 배우들도 2014년 시나리오를 읽고 노개런티 출연 의사를 밝인 손숙씨 외에 오지혜, 정인기 등 여러 분들이 재능기부로 참여하셨습니다.(시사회에서 영화를 봤는데 이분들의 안정적인 연기와 내공이 영화에 상당한 안정감을 부여했다) 또 스태프들도 후원자입니다. 모두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명감으로 이 영화 제작에 올인했습니다. 한 스태프는 차까지 팔아서 후원을 했습니다.”

-<귀향>의 줄거리가 어떻게 되나요?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었다가 ‘소각명령’에서 탈출하신 강일출 할머니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1943년, 천진난만한 열네 살 정민(강하나)은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 손에 이끌려 가족의 품을 떠나게 됩니다. 정민은 함께 끌려온 영희(서미지) 등 수많은 아이들과 기차에 실려 알 수 없는 곳으로 갑니다. 어리디어린 나이에 고통 속에 절명했던 수많은 소녀들을 비록 영혼으로나마 고향의 품으로, 집으로, 가족들 곁으로 돌려보내는 염원을 담은 영화입니다.”

-영화를 통해 바라는 게 있다면.

“20만명이 끌려갔고 238명의 할머니만 돌아왔고 현재 44명의 할머니만 생존해 계십니다. 저는 영화 상영관이 하나씩 늘 때마다 할머니들도 한 분씩 고향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합니다. 영화가 너무 힘들까봐 못 보겠다며 걱정들 하시는데 이 영화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치유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엔딩장면도 소녀들의 넋이 나비가 되어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할머니들의 넋이 돌아올 수 있도록 많이 와서 보시면 좋겠습니다.” 

 

1991년 8월,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증언을 했다. 일본 정부가 오리발을 내밀고 관련 자료를 은폐하고 파기한지라 국내에서의 진상조사는 생존자들의 증언이 꼭 필요하던 차였다. 이듬해인 1992년 1월부터 기나긴 수요집회가 시작되었다.
‘위안부’ 합의가 무섭게 소녀상 철거가 언급되고 있다. ‘평화의 소녀상’은 1000회차 수요집회 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회복을 위해 만든 조각상이다. 일본 정부는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건너편에 세워진 소녀상을 철거하지 못해 안달이 났다.

 

조정래 감독은 “할 수 있는 일이 영화와 국악밖에 없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뚝심이 7만5000명의 국민을 후원자로 만들고 몇 십 곳에 지나지 않던 상영관을 24일 개봉일에 400여개로 늘리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얼 할 수 있을까? 우선은 양평시네마에서 영화를 먼저 봐야한다. 이후 당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응답하라!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www.womenandwar.net):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동정, 수요시위, 국제활동 정보,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나비기금.
나눔의 집(www.nanum.org): 일제에 의해 성적 희생을 강요당했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 살고 계시는 삶의 터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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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객원기자는 소싯적 의상디자이너, 출판기획편집자, NGO 홍보팀장으로 일했다. 경남산청 시골 출신이라 서울서 늘 흙을 그리워했다. 4년 전 양평으로 이사해 놀멍쉴멍 글도 쓰고 책도 만들며 남편과 두 딸 아이와 지지고 볶으며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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