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서양화가 하태임

악보의 음표처럼 살아 움직이는 ‘색채 환상곡’
컬러밴드의 중첩과 충돌… 묘한 하모니 빚어내
짓눌렸던 현실의 무게, 마법처럼 밝고 경쾌해져

 

▲ Un Passage, 80×160㎝, Acrylic on Canvas, 2015

겨울이다. 밝은 무채색의 서늘한 풍경은 일상을 사는 현대인의 감성을 더욱 쓸쓸하게 한다. 해가 짧은 겨울은 활동 영역도 적어지기 마련이어서 웅크리고 틀어박힐수록 외로움은 더욱 증폭된다. 부지불식간에 문득 찾아오는 외로움에 당황하기도 하고, 몸서리칠 때도 있다. 파릇파릇한 싱그러운 들녘과 울긋불긋한 개나리와 진달래가 벌써부터 그립다. 

서울 삼육대 조형관에 있는 하태임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간 월요일, 겨울방학에 들어간 캠퍼스는 하필 부슬비까지 내렸다. 미국의 록 밴드 도어즈(Doors)의 ‘People are Strange’ 노랫말처럼 이방인의 눈에 빗속에서 얼굴들이 나타나는 것처럼 보였다. ‘People are strange when you're a stranger. Faces look ugly when you're alone….’/당신이 이방인이면 사람들도 이상해 보여. 당신이 외로울 땐 사람들 얼굴도 추해보이지…. 이러다 자칫 ‘계절성 우울증’에 걸리기 십상이다.

▲ Un Passage, 60×60㎝, Acrylic on Canvas, 2015

하 교수의 연구실 문은 밴드 도어즈의 이름이 의미하는 그것처럼 마치 ‘영원의 세계로 향하는 인식의 문’과 같았다. 영국의 시인 겸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가 쓴 ‘인식의 문이 닦여지면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구절처럼 문을 여는 순간 우울증의 경계에서 벗어났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그의 연구실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나서다. 

밝은 보랏빛 니트를 입은 하태임과, 봄날 만개한 꽃처럼 화사한 컬러밴드의 중첩과 충돌이 묘한 하모니를 빚어낸다.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마음이 어느 순간 밝고 경쾌해진다. 색의 획(劃)들은 얼핏 단순해보이지만 아크릴 물감이 몇 시간이고 마르기를 기다린 뒤 덧그리는 작업을 수없이 반복한 것이다. 특히 노란색은 12번까지 칠하는 작업을 거듭한다. 지나치지도 모자라기도 않는 균형과 절제, 그 위에 반복과 수련을 통한 감각과 경쾌한 색들이 더해진 결과다. 

하태임은 “나에게 색이란 음악에서 다양한 높낮이를 가지고 있는 음표들이 하나의 곡을 완성해가듯 색들의 반복과 차이를 통해 펼쳐지는 하나의 노래다. 미지의 세계로 향에 열려있는 ‘문’이자 ‘통로’”라고 했다. 그의 그림에서 음악적 운율이 느껴지는 까닭이다. 귀로 듣는 멜로디는 없지만 오로지 시감각에서 의해서만 ‘컬러 판타지’(색 환상곡)을 만들어낸다. 

▲ Un Passage, 60×60㎝, Acrylic on Canvas, 2015

하태임은 한국추상화 1세대인 하인두 화백(1989년 작고)과 한국화가 류민자 화백(양서면 청계리)의 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 그는 혼자 프랑스로 떠났고 디종 국립미술학교를 거쳐 파리 국립미술학교(파리보자르)를 졸업했다. 예민하고 섬세한 예술가들이 그렇듯 그도 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은 그를 엄습했다. 추상표현주의 기법으로 얼굴을 위주로 한 어두운 자화상을 그린 시기다. 그는 “명상하는 것처럼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 것 같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파리 생활에 점차 적응하면서 마음이 편해지니 그림과 주제도 바뀌었다. 우울감이 깊을수록 밝은 색은 더욱 강해졌다. 소통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문자나 부호를 그렸고, 그때 밑그림으로 그린 문자를 지우는 작업을 하면서 지금의 컬러밴드 작품이 됐다. 그는 “누구나 한번쯤은 언어의 백가지 표현보다 누군가의 표정이나 어떤 인상적인 장면으로 언어를 능가하는 소통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정한 소통은 지적인 어떤 것이나 문자, 부호가 아니라는 의미다.

▲ Une Extension, 76×146×6㎝, Stainless Steel, 2015

하태임이 ‘프린트 베이커리’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것도 대중과의 소통 때문이다. 서울옥션이 2012년 론칭한 프린트 베이커리는 국내외 유명 작가들이 참여해 제작한 한정판 디지털 판화 작품이다. 가격이 오리지널 회화 대비 20분의1 정도로 낮아 미술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다. 작품의 희소성이 없어진다거나 상업적이라는 일부 우려도 있지만, 상위 1%의 전유물인 미술품을 대중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고 미술 시장이 성장하는 측면에서 바람직하다는 의견이다. 그는 “프린트 베이커리는 작가가 대중과 만나는 통로”라고 평가했다. 

▲ Un Passage, 230×230㎝, Acrylic on Canvas, 2014

알록달록 컬러밴드 작가 하태임, 컬러 판타지와 컬러 심포니를 선보인 그가 내년 5월에 있을 개인전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다음 전시 주제는 ‘기억의 그림자’라고 될 것이라고 귀띔한 그의 다음 컬러는 자신도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작품 속으로 빨려들게 하는 황홀한 흡인력을 지녔을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하태임이 걸어온 길)

 

하태임(1973~)은 프랑스 디종 국립미술학교와 파리국립미술학교(파리보자르, D.N.S.A.P)를 졸업하고 홍익대 미대 회화과(박사)를 졸업했다. 현재 삼육대 문화예술대 미술콘텐츠학과 교수(학과장)를 맡고 있다. 모나코 국제현대회화전 모나코 왕국상(1999·모나코왕세자재단)을 수상했다. 

1995년 첫 개인전(종로갤러리, 서울)을 시작으로 파리 씨떼 데 쟈르(2007·프랑스 파리), 갤러리 프렌치메이드 초대전(2008·독일 뮌헨), 갤러리 아트사이드 초대전(2009·중국 베이징), 장흥아트파크기획전(2012·인사아트센터, 서울), 일호갤러리(2013·서울), 가나 컨템퍼러리(2013·서울), 갤러리아트앤썸머 초대전(2014·부산), 한경갤러리(2014·서울), 서울옥션(2015·서울) 등 국내외에서 18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오션어스 K-ART 대한적십자가 110주년 기념전(2015·오션어스아트홀, 부산), 미술사랑 키우지 모금전(2015·서울옥션), 월드비전과 함께하는 자선특별전 ‘아이드림’(2015·애비뉴엘 아트홀, 서울), 서울 아트쇼 ‘Made in Korea특별전’(2014·코엑스, 서울), 3인조 Color Band전(2014·CSP111아트스페이스, 서울), 환기미술관 후원전시 ‘김환기를 기리다’전(2014·환기미술관, 서울), 한국현대회화 33인전(2013·강동아트센터, 서울), 하태임·조현선 2인전(2013·팔레드서울, 서울), Small but Plenty전(2013·신세계백화점 본점·강남전, 서울), 한국·인도 교류전(2013·한벽원 갤러리, 서울), CNB 소아암어린이 돕기 후원전(2013·진화랑, 서울), 화랑미술제(2013·코엑스, 서울), 한국·인도 40주년 교류전 ‘The Spirit of Forms’(2013·한국문화원, 인도), 제15회 방글라데시 비엔날레(2012·실파카라 아카데미, 방글라데시), ‘K아트스타-美의 제전’(2012·한경갤러리, 서울), ‘맥캘란과 함께하는 11명의 예술가전’(2012·갤러리 아트사이드, 서울), ‘추상화로 감상하는 색채 교향곡’(2012·서울시립미술관, 서울), 가정의 달 특별기획 ‘가족전’(2012·양평군립미술관, 양평), 장애-비장애 아동을 위한 유쾌한 예술치료축제 ‘아싸라비아’(2012·장흥아트파크, 장흥), KIAF2010(코리아 국제 아트페어), G20서울정상회의 개최기념전(2010·국회도서관), 이경·하태임 2인전 Color&Stripe(2010·장흥아트파크), ‘장자 그리고 나비’(2009·가나아트, 부산), 시카고 아트페어(2007·미국 시카고), 모나코 국제현대미술전(1999·모나코) 등 국내와 해외에서 140회가 넘는 그룹·기획전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미술은행), 모나코 현대미술관, 태평양 아모레 뮤지엄, 양평군립미술관, 삼성전자, 삼양사, LG전자, 두산그룹, 고려제약, 벽산엔지니어링, 녹십자, 카펠라호텔, 서울가정행정법원, 연세대 에비슨의생명연구센터, 한국전기안전공사 신사옥 등 수많은 기관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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