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서양화가 박동명

무명·새내기 작가 전시회 열어주고,
자선 기금모금행사 실행하며 성취감

“기자님, 저는 그림을 안 그린 지 꽤 됐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화가라고 불려서도 안 되고… 무엇보다 묵묵히 작품 활동하는 분들에게 큰 실례가 됩니다.”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던 박동명이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은 자신이 얼마나 예술을 사랑하고 또 생활 속에서 실천하려고 하고 있는지 지면을 빌어 고백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주변 선배들의 조언 때문이라고 했다.

서양화가 박동명은 스스로 ‘작가’라는 직함을 내려놓은 지 좀 됐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에게 작가는 줄곧 어릴 적부터 꿈이었고, 그 열정을 주변에서 모두 인정하던 터라 화가의 길을 당연히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단다.

하지만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하고 양평에 자리를 잡으면서 사회생활이 그리 녹록치 않음을 온몸으로 깨닫게 됐다고 한다. 실패와 시행착오의 연속인 머나 먼 타향에서의 방황은 천직이 될 줄 알았던 작가의 꿈을 자꾸만 좌절시켜갔다.

이러한 시련이 아이러니하게도 박동명에게 또 다른 시각의 눈을 뜨게 했다. 그는 “어쩌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고도 했다.

▲ 기원(2009-10) 59×84㎝, ink on paper, 2009

“물감냄새 가득한 나만의 작업실에서 마음껏 그림 그릴 수만 있다면 더 없이 행복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내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데 꼭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려고 고집을 피워야 할까 싶더라고요. 그건 어쩌면 그릇된 욕망이고 또 행복해질 수도 없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마음을 비우자 이전에는 상상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시각이 생기더군요. 세상의 모든 곳을 빈 캔버스라고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는 구상을 그림 그리듯 실천해가는 것도 또 다른 의미의 예술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물론 그걸 깨닫고 받아들이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박동명은 현재 서울시 종로구 서촌에 위치한 갤러리 ‘자인제노’의 기획자로 활동하면서 양수리에서 조그만 카페와 민박을 운영하고 있다. 매년 연초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작가와 새내기 작가를 공모해 그룹전을 진행하고, 그중에서 다시 재능 있는 이들을 골라 개인전까지 열어주고 있다.

형편이 넉넉지 않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이러한 전시가 얼마나 필요하고 또 힘이 되는지 자신도 겪어봤기 때문에 그도 잘 안다. 그래서 그는 독립유공자 모임이나 장애인단체, 동물보호단체 같은 비영리 그룹들의 기금모금행사 요청이 있으면 국내 유명작가들과 공연자들을 연계시켜 그들의 선의의 목적을 이루게 돕고 있다.

▲ 기원(2010-5) 84×119㎝, ink on paper, 2010

지금까지 ‘우당 이회영 기념사업회 기금모금 마련전’, ‘성바오로학교 장애학생 미술전’, ‘한국뇌성마비 곰두리축구단 기금모금 마련전’, ‘배우 고(故) 장자연 씻김굿을 위한 기금전’, ‘동물보호단체 카라 기금모금전’, ‘굿네이버스와 함께하는 아이티 어린이 돕기 전시’, ‘소년소녀가장 돕기 전시와 공연’, ‘다문화 가정을 위한 아시아의 행복한 동행전’, ‘World Harmony Run 폐막행사’ 등 수많은 자선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저에게는 이러한 기획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것도 예술가로서의 당연한 책무이자 성취감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직된 세상에 윤활제로서 예술이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고, 또 그로인해 모두가 상생할 수 있다면 굳이 내가 그린 작품만 예술이라고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 했습니다.” 박동명의 생각을 듣다보면 한마디로 압축된다. 바로 ‘예술로 세상 바꾸기’다.

▲ 기원(2007-30) 56×46㎝, acrylic on canvas, 2007

그는 자신의 이런 생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라고 했다. 소비에트 시절 영화감독이지만 러시아 영화감독으로 불리고 싶어 했던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그의 예술영화에 매료됐던 박동명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빈센트 반 고흐도 파블로 피카소도 아닌 러시아 영화감독의 말 한마디를 마치 종교적 명령처럼 머릿속에 각인시켰다고 했다. 

 

“예술은 사악하고 부조리한 곳에 힘과 희망을 주는 것”

 

▲ 박동명은 ‘예술로 세상 바꾸기’를 마치 종교적 명령처럼 실천하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조그만 카페는 장애학생과 독거노인들에게 수동적 복지가 아닌 자립의 힘을 실어주는 장소다.

최근 몇 년째 박동명이 관심을 갖는 것은 장애학생과 독거노인과 같은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취약계층들이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그려가는 것이다. 충분히 움직일 수 있음에도 생계물품을 지원받는 수준의 수동적 복지만 바라게 되면 육체적으로 퇴행할 뿐만 아니라 패배주의에 빠져 살게 되고 희망 없는 복지의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양일고등학교와 협약식을 맺고 장애학생들과 독거노인들을 위한 커피 바리스타 자격증반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단순히 교육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지자체의 도움을 받아 문화장터나 토요 야시장으로 진출해 실습까지 진행시켜 예비창업과 취업까지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꼭 필요한 스토리텔링과 캐릭터, 로고디자인까지 기획중이다.

“제가 그림을 그만두기 직전까지 매달렸던 주제는 꼬여있는 실타래와 끝을 알 수 없는 뿌리덩어리였습니다. 아마 세상을 그렇게 절대로 풀리지 않는 혼돈으로 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시작, 즉 기원을 찾으려고 했는데 그것만이 이 혼돈을 해결할 수 있는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하고자 하는 일들도 큰 의미에서 이 주제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현대사회가 가진 거대한 부조리와 악순환의 실타래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무기력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보자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꿈과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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