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서양화가 이정걸

소멸과 생성 속 시간의 조각 화면에 담아내
노란은행잎, 소멸하는 나무의 처절한 몸부림
낡고 닳아 없어지면 또 다른 생명으로 살아
화려한 색감, 없어지는 것들 아름답게 표현

▲ Time Slice-1307│175.2×140㎝│Mixed Media on canvas│2013

생명은 소멸에 이르고, 소멸은 다시 또 다른 생명을 낳는다. 둘은 고리를 이뤄 돌고 돌아 앞뒤가 없다. 동전의 앞뒷면처럼 공존하면서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역동적 장치다. 사라지는 것이 있으면 또 생겨나는 것이 있고, 해가 지고 나면 달이 뜨고, 달이 지고 난 다음날 아침이면 햇살이 또 다시 밝게 떠오르듯이.

서양화가 이정걸은 한 화면에 소멸과 생성을 동시에 담아 이야기하는 작가다. 인간을 포함해 이 땅의 모든 생명체에게 소멸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렇다고 소멸로 모든 게 끝은 아니다. 그 소멸에서 결국 새로운 생명이 움트기 때문이다.

이정걸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잎은 사람의 눈으로 보기엔 아름답지만 나무 입장에서는 소멸하는 순간의 처절한 몸부림에 의해 발현된 결과물”이라고 했다. 그래서 소멸하는 것은 비참하거나 처절하지 않다.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다. 

존재에 대한 소멸과 생성은 많은 예술가들이 작품의 주제로 삼는 영역이다. 이정걸은 자신만의 사고와 방법으로 시간의 조각을 통해 소멸과 생성을 화폭에 담아낸다. 낡고 닳아 없어지면 반드시 다른 생명체가 올라오기 마련인 것은 자연의 이치다. 

▲ 기억 속에서│52.5×45.3㎝│Acrylic on Canvas│2010

‘Time Slice-14years(7)’는 캔버스가 아닌 천막에 여러 재료를 혼합해 만든 작품이다. 시골 농가의 축사에 덮여있던 바람막이용 천막을 활용했다. 14년간 한자리에서 세월의 풍파를 겪은 천막을 보는 순간 그가 작품에서 추구하는 생성과 소멸이 떠올랐다. 나무를 구입해 프레임을 만들고 그 위에 천막의 천을 잘아 올려놓고 당겨 고정시켰다. 그런 후 더 이상 상하지 않게 접착제를 앞뒤로 바르고 너무 많이 상한 부위는 여분의 천을 잘라 덧대어 꿰매기를 반복했다. 어느 부분들은 인두를 달궈 구멍을 더 만들었다. 그의 작업 과정은 그림을 그리기보다 만들기에 더 가까워보였다. 

작품 ‘Time Slice-1307’은 짧은 순간에도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세포를 형상화했다. 골다공증으로 구멍이 난 뼈, 해질녘 빛에 반사된 강가에 반타원형으로 어른거리는 물결 모양은 ‘일그러지는 원형’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 단풍이 가진 오색의 향연을 입혀 역동적이고 화려한 모습을 더했다. 낡고 닳아 소멸하는 존재가 사람들에게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이 작품을 멀리서 보면 흐릿한 실루엣은 사람 4명이 서있는 형태다. 마네킹을 촬영한 후 컴퓨터 작업을 거쳐 형상만 떼어내 확대했다. 진짜 사람이 아닌 마네킹을 사용한 이유는 생성과 소멸의 보편성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아날로그적 손 작업과 더불어 컴퓨터 프로그램을 활용한 디지털 작업도 융합된다. 잘라내고 붙이기를 반복하고, 칠하고 긁어내기를 또 반복한다. 연속되는 작업의 반복 속에 소멸과 생성이 교차하고, 결국 그것들은 하나가 된다. 

▲ 기억 속에서-2│20×120㎝│Acrylic on Wood│2010

그는 “빛과 강 물살이 만들어낸 현상은 신기하고 묘한 느낌이 든다. 인간의 몸에 자리하고 있는 무수한 세포들이 저러하지 않을까? 세포들에게 색이 있다면 인간들이 지금까지 보지 못한 화려하고 찬란한 몸짓과 자태를 뽐내면서 새로 만들어지고 없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저렇게 춤을 추고 있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작품의 대부분은 강렬한 원색과 무채색들이 서로 뒤엉키면서도 조화를 이룬 색감이 돋보인다. 소멸과 생성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천착하면서도 그 결과물 자체는 아름답게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작가의 의지다. 

▲ Time Slice-14Years(7)│124×120㎝│Mixed Media on Tentage│2012

이정걸이 11년 전 쓴 작업노트다. 이 때는 그가 양평에 올 무렵이다. ‘길을 걷다 발을 멈추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오래된 나무막대기, 간신히 매달려 있는 녹슨 못. 언젠가 누군가의 정성스런 손길이 닿았을 법한 그 무엇이 만든 이의 숨소리가 들릴 듯이 나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한쪽 귀퉁이에는 허리가 구부러지고 녹이 슨 못이 세월의 흔적을 마지막으로 힘을 내어 나에 여린 소리로 전해주려는 듯, 떨어질 듯 말 듯 녹슨 채 힘겹게 붙어있다. 그런 모습이 나를 사로잡으며 작품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탄생과 함께 죽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인간처럼…’

 

(작가가 걸어온 길)

▲ 이정걸은 소멸의 흔적에 깃든 생명의 불씨, 손과 기계로 만든 실재와 허상의 합작,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발견하는 가족의 행복을 들려준다.

이정걸은 1961년 경북 영덕군 영해면에서 출생해 영해초·중과 부산 배정고를 졸업하고 경희대(서양화)와 동 대학원(미술학)을 졸업했다. 전업 작가로 서울과 여주 등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 11년 전 양평으로 와 용문면 중원리에 작업실 ‘예너울 스튜디오’를 차렸다. 

한국미협, 한국현대조형작가, 양평미협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경희대, 동덕여대, 숭의여대, 인덕대 강사를 역임하고 경기통일미술대전과 대한민국 현대미술대전, 이천산수유 전국사생대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MBC 아침드라마 ‘모두다 김치’(2014), SBS 수목드라마 ‘상류사회’(2015)에 작품을 협찬했다.

MBC 미술대전(한가람미술관·1993·1994) 입선, 신미술대전(디자인포장센터·1993) 입선 및 대법원장상, 동아미술대전(국립현대미술관·1994) 입선, 2014 Best Innovation 기업&브랜드 문화·예술부문(스포츠서울·2014), 제34회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미술부문) 심사위원 선정 특별상(서울 국제회의장·2014) 등을 수상했다.

1992년 서울 백송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연 뒤 서울 인사갤러리(1994), 독일 민델하임텍스틸미술관(1996), 서울 인사아트센터(2010·2013), 서울 레지나갤러리(2014), 부산 벡스코(2015) 등에서 7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Berliner Liste (독일 Munze Berlin Molkenmarkt·2010), Art Chicago (미국 The Merchandise Mart·2011), Busan International Art Fair(부산 문화회관·2012), Hong Kong Contemporary(홍콩 The Park Lane·2012), Art Asia Art Fair(서울 COEX·2012), Doors Art Fair(서울 Imperial Palace Hotel·2013), Art Hamptons(미국 Benefits Guild Hall·2014), Art Busan(부산 Bexco·2015) 등의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가했다.

1992년 표현과 검증전(서울 인데코갤러리)을 시작으로 올해까지 국내와 해외에서 50회가 넘는 단체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올해 참가한 단체전은 한독 교류전(독일 베를린문화원 바크 갤러리), 현대조형작가회 ‘몽골초대전’(몽골 국립현대미술관), Oceanus K-art ‘한국현대미술의 비전’(부산 오션어스 아트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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