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서양화가 배석빈

세상과 거리 둬 자아 비평적 내려놓기
보고 확인하는 물질 아닌 정신적 탐구
“인위적 개발로 인한 재앙은 자연의 경고
… 예술의 최고가치는 원래 있는 것 보존”

 

▲ 원주율(Pi), 60.6X72.7㎝, oil on canvas, 2015

배석빈은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을 ‘없는 상태’로 두길 바란다. 자신의 그림에 어떠한 목적과 의도가 없는 상태를 실천하고자 한다. 몰아(沒我)와 무위(無爲)의 경지에 다다른다는 것인데, 이게 쉬운 일일까. 그는 “가능한 인위적인 것을 배제하고자 한다. 이를 계속하면 언젠가는 결국 무언가 드러나게 된다”고 말했다. 

가령 꽃밭의 잡초를 뽑고, 잔디를 염색하고, 애호박에 비닐을 씌우는 것 등은 사람들이 의도를 갖고 하는 행위들이다. 자연을 그대로 두지 않겠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배석빈이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대상을 보고 무언가 그리겠다고 의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는 의식적인 시선으로 사물을 보고 대상을 눈으로 확인하는 물질적인 것을 지양한다. 이보다는 정신적인 탐구, 마음의 중심을 이루는 요인들과 관련된 것을 회화로 나타낸다. 

 

▲ 깊이(depth)1, 73X91㎝, oil on canvas, 2015
▲ 깊이(depth)5, 91X117㎝, oil on canvas, 2015

배석빈의 그림은 어느 쪽에도 자신을 귀속시키지 않는,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둔 상태에서 스스로를 내려놓는 과정의 산물이다. 그림에서 ‘인식의 주체가 제거되는’ 곳, ‘내가 소멸되는’ 그곳으로 향하는 작업이다. ‘나’라는 의식, 일상적인 의식의 밖에 서있는 상태를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영원과 유한한 시간에 대한 묵상, 보이지 않는 차원과 보이는 세계의 연결고리들, 사유와 실존의 상관관계…. 배석빈의 회화는 이처럼 사유의 드넓은 스펙트럼에서 기인한다. 

배석빈은 자연의 신비로움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작품 ‘원주율(Pi)’은 그 대표적인 예다. 원의 둘레를 지름으로 나눈 값이 원주율(π)인데, 이 원주율은 강 둘레의 실제 길이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강을 발원지에서 하류까지 흐르는 경로를 따라 측정한 길이와, 지도상에서 측정한 직선거리의 비율을 계산하면 평균 3보다 조금 큰 값이 나온다. 강의 실제 길이는 직선거리보다 세 배가 조금 넘는 3.14의 값이 나온다”고 말했다. 원주율과 거의 같은 값이다. 

 

▲ 모든 획(all strokes), 130.5X162㎝, oil on canvas, 2015
▲ 뿌리(roots), 130.5X162㎝, acrylic on canvas, 2015

‘원주율’은 단순한 수학적 기호를 넘어 자연의 경이로움을 나타낸 작품이기도 하지만, ‘개발’의 폐해를 지적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물줄기를 인위적으로 곧게 하고 강 밑바닥을 파헤치는 사람들의 ‘목적’, 즉 인위적 행위에 대한 재앙을 경계하는 경고의 메시지다. 

작품 ‘델타’도 마찬가지다. 영어로 삼각주를 뜻하는 델타(delta)는 삼각주 모양이 그리스문자 델타(Δ)와 비슷해 붙여진 이름이다. 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에 강물이 운반해온 모래나 흙이 쌓여 이뤄진 편평한 비옥한 삼각형의 퇴적지형이다.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가 대표적이고, 우리나라는 압록강 용천 평야와 낙동강 김해 평야가 여기에 속한다. 배석빈은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과 지구 온난화로 이런 삼각주들이 사라지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또 사람이 사용하는 강과, 자연 상태의 바다라는 서로 다른 성분과 요소를 그는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다. 

 

▲ 델타(delta), 53X41㎝, oil on canvas, 2012

배석빈은 대학 진학을 앞두고 공대를 가려고 했으나 진학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미대로 전환했다.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 엔지니어보다는 예술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악기를 다뤄야 하는 음악보다 미술은 다가가기 어렵지 않았고, 무엇보다 어릴 적부터 취미삼아 그린 그의 그림실력으로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다. 

그는 작품 활동을 과장하고 포장하는 게 당연시되는 풍토에서도 그만의 길을 걸어왔다. 1992년부터 지금까지 열다섯 차례의 개인전을 열면서 전시도록도 간략한 브로셔나 우편엽서로 대신했다. 예술가의 삶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무조건 아름답고 새로 만드는 것보다는 원래 있는 것을 보존하는 게 예술의 첫째 가치라고 본다”며 “물질적 가치로 사람을 평가하고 재산의 양으로 관계를 계산하는 자본주의적 사고로 예술가를 소외시켜는 일이 없길 바란다”고 말했다.


(작가가 걸어온 길)

 

▲ 배석빈의 작업은 깊고 넓은 사유에서 비롯된다. 목적과 의도를 갖지 않는 무위(無爲)를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그의 그림은 사람들의 욕망으로 비롯된 인위적인 개발의 폐해를 고발하고 있다.

배석빈은 1963년 출생해 서울대 미술대 회화과와 동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첫 개인전인 ‘여러 가지 생각’(1992·신세계미술관)은 가족구성원 안에서 구별이 없던 개체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분리되는 변화에 관한 서사를 담았다. 두 번째 개인전 ‘열흘붉은꽃없다’(花無十日紅, 1993·보다갤러리)는 세월이 가도 변함없는 자연과 사람 마음의 무상함을 대비해 표현했다. 과거로의 몽환적 회귀를 소재로 삼은 ‘더운 공기’(1994), 자유로운 가상세계를 프로펠러에 비유한 ‘부채’(1996·인데코화랑), 물감을 덧칠해가며 그림 그리는 것이 몸의 상처를 붕대로 싸매는 것과 같다는 생각에서 그린 ‘the Dressing’(1999)을 발표했다.

이후 ‘공간을 나르는 시간’(2002·갤러리우덕), ‘원주율’(2003·갤러리 라메르), ‘숨쉰다’(2005·남양주아트센터), ‘7년 전에’(2006), ‘생각의 무게’(2003·갤러리 빛뜰)를 잇따라 발표했다. 2011년, 소멸하는 것을 모으고 시간을 붙잡는 일에 관한 생각들로 이뤄진 ‘붙잡다’(노암갤러리)를 발표하고, 2012년에는 우리가 보는 세계 너머의 공간에 관한 상상을 토대로 한 ‘건너편’(인사아트센터)과 ‘Calm Chaos’(고요한 혼돈, 아트팩토리)를 연이어 내보였다.

2014년 ‘구심력’(스페이스 함)에서 마음의 중심을 이루는 사고에 관한 드로잉과 회화 작품들을 공개했다. 올해 열다섯 번째 개인전 ‘깊이에 관하여’는 수업을 마친 후 30년간 작품생활을 하면서 세계의 본질과 원리에 다가가는 창작 태도의 정체를 발견하는 전시다. 강상면 병산리 봄파머스가든 내 갤러리 류미재에서 지난달 30일까지 전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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