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만 장편소설〉미친 사랑(121회)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신민당 표가 강세다. 용해뿐 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다. 사실 정보형사뿐 아니라 모든 경찰은 野성향을 지닌다. 그런 경찰을 특급 친여분자로 간주하는 여당이 안타깝다. 그럼 왜 친야적일까?

 

또 미나에게 속은 셈이다. 이혼 도장을 찍으러 가자더니 소식이 없다. 용해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할 때라고 생각한다. 사표를 내기로 마음을 정리한다. 무슨 수로든 굶어죽진 않겠지. 용해는 보이지 않는 장은하에게 제발 굳세어달라고 주술 같은 말을 쏟아내고 출근준비를 서두른다.

 

공화당 종로구 후보의 선거유세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용해는 채증을 위해 현장에 나가 카메라를 조작하고 있었다. 이화동 주민들과 공화당 간부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전에 억지를 부린 적 있는 그 외사계장이 또 용해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지역 주민들이 보고 있는 현장에서 당한 일이 창피해서 용해는 “당신 이리 오쇼.” 하고 계장에게 막말로 대들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용해는 계장을 골목으로 끌고 갔다. 골목으로 당 간부들이 운집했다. 그들은 용해가 신민당원을 끌고 온 모양이라고 여겼다. 이내 언쟁은 끝났지만 용해는 상사에게 당신이라고 삿대질하며 대든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 여파는 뻔할 것이었다. 용해는 예전처럼 사표를 각오하고 대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계급이 높은 상사에게 대든 행위는 경찰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업무를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와 보니 분위기는 이미 용해가 예상한 대로였다. 모든 이목이 용해에게 쏠렸다. 그리고 외사계장을 싫어하는 대다수 직원들은 모두 용해의 행동에 용감하다며 격려와 위로를 주었다. 사실 계장은 자격이 없는 상사였다. 용해는 직원들과 술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더 참았더라면, 하고 뉘우치기도 했다. 물론 그 상사와는 싸우지 않을 수 없었지만 자기 열등감에서 그러는 상사에게 차라리 애정을 주었더라면 어쩔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골목에서 계장은 용해에게 화낸 것이 아니라고까지 말했잖은가. 그만한 일로 상사에게 모욕을 주다니. 동료들도 지금은 자기를 추어주지만 결국은 자기를 경계할 게 뻔했다. 용해는 요즘 아내의 가출과 미나로 말미암은 정신적인 부하에 눌려 신경이 날카로워졌다는 사실을 깨닫자 자신의 성질을 눙쳐야겠다고 다짐했다.

비가 내리는 데도 학생 데모는 계속되었다. 오늘은 서울대 의대생들까지 튀어나와 양상은 더욱 악화되었다. 구속학생 석방에서부터 “위장된 민주주의에 대한 통곡”으로까지 구호가 거칠어졌다.

날이 갈수록 뒤숭숭해지는 세태이다. 민주주의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갈등이 첩첩산중이다. 군인들의 납치사건, 수류탄 투척사건, 총기난사사건이 자주 발생하고 있어 그 또한 불안을 조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제는 청백리로 소문난 서울시 부시장을 만나 현실을 걱정했지만, 비단 여당뿐 아니라 야당도 질책을 받아 마땅하다. 건실한 야당을 바라는 국민에게 신민당 역시 공화당의 부패 못잖은 실망을 주고 있다. 그들 역시 국가관과 거리가 먼 자기들 잇속에만 눈이 멀어 있다.

지금도 용해의 몸에서는 최루가스 냄새가 난다. 비가 내리니 가스가 지상에 깔려 몸에 밴 것이다. 학생들은 용해의 카메라에 찍히지 않으려고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데모한다. 용해의 카메라에 찍히면 문교부에 통보되어 인적사항이 탄로 나고 만다. 때문에 학생들의 날카로운 돌은 더 예민하게 용해를 노린다. 돌은 학생들의 정의감에 불타는 적개심과 원망과 멸시를 담은 채 용해의 육신을 향할 것이다. 학생들의 행동을 누구보다 옹호하고 진심으로 아끼는 용해의 진실을 몰라주고 다만 ‘앞잡이’로만 매도하는 것이다. 카메라 초점을 들이대는 정보형사로만 보고 저주하는 학생들의 증오심을 느끼며 용해는 자신의 팔자가 헛웃음 칠 만큼 기구하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하지만 학생들의 행동을 칭찬하고 싶어진다. 그들로부터 무엇인지 뜨거운 성과가 나타나기를 은근히 바란다. 용해는 그런 자신의 도량에서 자부심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모순적인 운명을 멋으로 여기고 싶어진다.

그런데 왜 집권당에 봉사하는 업무에 충실할까?

용해는 참 조직이란 게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찰조직을 그처럼 오염시키는 정치가 밉기도 하다. 5월 25일. 어쨌든 오늘은 제8대 국회의원 선거일이다. 용해는 동대문갑구 개표장에서 채증 기구를 갖추고 밤 새워 대기했다.

신민당의 표가 강세다. 용해뿐 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다. 사실 정보형사뿐 아니라 모든 경찰은 野성향을 지닌다. 그런 경찰을 특급 친여분자로 간주하는 여당이 안타깝다. 그럼 왜 친야적일까? 두 말할 것도 없이 비판세력을 키우기 위해서다. 모름지기 신민당은 이 나라 국민의 갸륵하고 위대한 충정을 배반해서는 안 된다. 신민당이 예뻐서 찍어준 게 아니며 심지어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떠나서까지 이 나라 야당 육성과 공화당 횡포를 막기 위해 표를 던져준 것이다. 그만큼 의식수준이 높아진 국민의 지혜를 재평가해야 한다. 이제 위정자는 바야흐로 이 나라에도 민주주의 정신이 만개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서울에서는 18개 구 중 17개 구에서 신민당 승리. 경상도에서도 신민당이 대거 당선되었다.

선거 이튿날만 겨우 잠잠하더니 오늘은 새벽 4시반까지 출근하라는 정보형사 비상소집이 관내 파출소를 통해 전달되었다. 데모로 서울대 법대, 문리대, 상대가 휴교조치를 당했는데 무슨 특이한 동정이 있는 모양이다. 총선 결과 야당의 대승으로 견제세력이 확보되어 선거후유증도 없을 텐데 구속학생을 석방하지 않고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당국의 처사가 한심하다. 종로 공화당 후보는 영세민에게 약속한 밀가루를 왜 주지 않는지. 낙선했대서 그렇게 약속을 깨도 되는가? 막걸리집 석굴암에 모인 직원들은 쓰잘데없는 농담으로 피로를 풀었다. 용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옛날 자유당 시절에 어떤 광산업자가 국회의원으로 출마했어요. 그는 겨우 한글만 아는 수준이었는데, 합동정견발표회장에서 연설을 시작했다가 말문이 막히자 ‘나를 당선시켜주면 집집마다 콩 한 말과 고무신 한 켤레를 보내주겠다고 했죠.”

“그래서, 당선됐나?”

반장이 물었다.

“되고말고요.”

“선거공약은 어찌 됐지?”

“약속대로 집집마다 콩 한 말과 검정고무신 한 켤레씩을 보내줬어요.”

“그 시절이 의리는 살아 있었군.”

“그만큼 순박했던 시절이었죠. 그 순박이 비리였지만.”

맹 형사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참견했다.

“그럼 지금은 약은 세상이란 말인가?”

“그만큼 인성이 비틀어졌다는 거죠.”

“인성 탓이라… 역시 무사안일주의가 최고야.”

“그럼 우리도 타락했다는 거겠죠?”

“이 사람아, 우린 타락이 뭔지를 몰라야 돼. 그 정도로 무식해지란 말야. 알겠어?”

“명심하겠습니다.”

맹 형사가 피씩 웃는다. 그 웃음새가 달관의 경지를 느끼게 한다. 밤이 깊어지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직원들은 각자 뿔뿔이 헤어졌다. 선거가 끝날 때마다 느껴지는 허탈감은 항상 그 맥없는 농으로 풀어버리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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