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만 장편소설〉미친 사랑(122회)

가정법원에서 만나다

 

 

“이 남자는 아내보다 하늘의 별을 더 좋아한다고요. 그래서 조화가 안돼요.”

“그럼, 아내도 별을 좋아하면 될 것 아뇨?”

“하기야 별을 싫어할 사람이 뉘 있겠어요. 하지만 이 남자는 그거에 미쳤다고요. 별이 넋을 빼갔어요.”

 

우중충한 날씨다. 무덥기도 하다. 가정법원 대기실에는 남녀 몇 쌍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혼을 하는데 줄을 서다니. 헤어질 걸 뭐하러 면사포를 쓰고 하객을 모으고 야단법석을 떨었지. 용해는 그들이 백년을 살자며 결혼식장에서 서약했을 장면을 떠올리자 결혼식은 고사하고 아예 식 자체를 부정한 자기 입장에 자부심마저 느껴진다.

죽어서 흙이 되면 그만인 걸 미쳤다고 그런 형식을 갖춰, 지지리 못난짓들. 그는 결혼절차를 무시한 자기의 사고방식을 모든 서울시민에게 자랑하고 싶다.

“도용해 씨 박미나 씨 들어오세요.”

대기실에서 연방 담배를 피우며 어정거리는데 예쁘장한 여직원이 나와 불러들인다. 두 사람은 문초를 받듯 판사 책상 앞에 나란히 앉는다. 판사는 두 사람의 얼굴을 한번 훑어보고 나서 이혼 사유를 묻는다.

“헤어지려는 이유가 뭡니까?”

“성격 탓입니다.”

용해가 먼저 대꾸한다.

“어느 부부나 성격이 맞을 순 없죠. 그걸 조절하며 사는 게 부부잖아요?”

“이 남자는 별나거든요.”

미나가 얼른 받는다.

“별나다뇨?”

“이 남자는 아내보다 하늘의 별을 더 좋아한다고요. 그래서 조화가 안돼요.”

“그럼, 아내도 별을 좋아하면 될 것 아뇨?”

“하기야 별을 싫어할 사람이 뉘 있겠어요. 하지만 이 남자는 그거에 미쳤다고요. 별이 넋을 빼갔어요.”

“참 묘한 성격 차이네요.”

판사는 미소를 머금은 채 한 번 더 화해할 소지가 없겠냐고 묻는다.

“없습니다, 빨리 헤어지고 싶어요.”

미나가 당돌하게 말한다. 숫제 뽐내는 기색이다. 헤어진다는 것이 무슨 자랑거리나 되는 양 판사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세운다. 미나의 그런 태도가 용해는 신선하게만 보인다. 자기가 할 말을 미나가 대신 해준 데 대하여 고마움이 느껴진다. 자기가 그런 말을 하기는 좀 찜찜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또 판사 앞에서는 미나의 체면을 세워주고 싶었는데, 자기가 미나한테 버림받는 입장이 되고 싶었는데, 미나가 먼저 도도한 모습을 보이니 천만다행이다.

용해는 진심으로 미나 앞에서 겸손해지고 싶었다. 그것이 미나가 법원까지 나와준 성의에 대한 최대의 예의였다.

용해는 판사실을 나와서도 미나에게 주눅이 든 모습으로 일관한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꺼벙하게 서서 담배만 피워댐으로써 마치 미나에게 버림받은 모습을 꾸미려고 애쓴다. 그게 복받을 짓 아닌가.

“이제 끝난 거죠? 또 도장 찍을 데 없어요?”

밖으로 나오자 미나가 눈꼬리를 치켜올린다. 오늘 아침 몇 시간 동안에 변한 미나의 당찬 모습이다. 그녀는 당장 귀부인이 될 작정인 모양이었다. 아까 나타날 때부터 화장과 옷차림이 달라보였고 귀티마저 풍겼었다. 용해를 바라보는 눈빛 역시 차고 거만했다. 용해를 자기 발 아래로 깔아뭉개는 위압적인 자세였다.

용해는 정말 미나가 돋보였다. 부산에서의 검찰 말마따나, 자가용 타고 거드름피우는 귀부인과 꾀죄죄한 어부 사이의 간격만큼이나 미나가 돋보였다.

“행복하게 살아. 보란 듯이…”

“용해 씨도 잘 살아요.”

미나는 당신이란 말 대신 용해 씨라고 호칭을 바꾼다. 용해도 미나 씨라고 부른다.

“고마워 미나 씨.”

“미나 씨? 그것 참 듣기 좋네요. 꼭 청춘 남녀가 연애하는 기분이에요. 뭐씨 뭐씨 하며 교양 떠는 모습들.... 우린 그렇게 교양 떤 적 없었죠?”

“그럼, 없고말고지. 우린 처음부터 신선했잖아? 나는 미나 씨를 이상한 여자로 봤고 미나 씬 나를 거지새끼로 봤고.”

“멋있는 추억이었죠… 그럼 어서 헤어집시다. 또 정 붙으면 큰일이니까.”

“미나, 마지막으로 나한테 욕 한마디 해줘. 잘 가라 이 못난 놈아 하고.”

“그래줄까요? 좋아요, 그럼 잘 가라 요 개새꺄!”

미나는 몸을 홱 돌린다. 그리고 용해를 덩그마니 남겨둔 채 법원 건물 저쪽으로 한들한들 걸어간다. 그때 까만 승용차가 미나 앞으로 미끄러진다 싶더니 그녀의 몸이 곱게 모셔진다.

미나가 탄 벤츠는 시위라도 하려는 듯 용해 앞을 스쳐 지나간다. 용해는 눈이 부신다. 눈부신 빛살 사이로 뒷자석에 나란히 앉은 차명구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미나의 눈은 용해를 무시한 채 앞만 꼬나보고 있다. 용해는 그녀의 거만한 풍채가 사뭇 자랑스럽다.

그래, 높이 날아보렴. 연처럼 높이높이 날아올라 온 세상을 네 발 아래에 깔아뭉개보렴. 나는 너를 높이 띄울 바람이 되어주마. 마음속으로….

집으로 돌아온 용해는 빈방에서 몸을 뉘었다. 이상한 기분이 든다. 그처럼 헤어지고 싶어 몸부림 친 여자인데, 무슨 하고 있던 귀중한 일을 중동무이한 기분이 든다. 시원한 기분이 아니다. 그 미결의 일이란 무엇일까? 아직도 증오가 남아 있단 말인가? 아니면 귀찮은 일도 끝을 내면 허전할 법일까? 지금은 장은하 생각 대신 도장을 찍고 헤어진 미나 생각 뿐이다. 엉뚱하게도 그 생각은 미나의 행복에 모아진다. 자신이 미나의 행복을 막아놓고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그 배려가 아무래도 위선 같다.

그럼 나는 승자일까?

아니다. 더 깊은 ‘패자’로 추락할지 모른다. 그 추락이야말로 용해에게는 당위요 운명이다.그런 생각이 들자 용해의 몸은 일시에 나른해진다. 그처럼 몸이 풀어지고 나니 장은하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번에는 장은하가 가여워진다. 장은하가 지금 떠돌고 있을 그 발걸음이 고단해 보이기만 한다. 장은하에게는 어떤 배려가 필요할까? 대책이 없다. 용해는 그 또한 자신을 추락시키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진리포구가 떠오른다. 자신이 혼자 지내던 곳, 진리 포구를 찾아가는 것이 장은하에 대한 연민을 치유하는 방법이다. 항상 四자를 끌어안고 살던 곳, 죽을 사자(死)가 연상되어 남이 가장 싫어하는 숫자인 四자. 바그너가 서양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13이란 숫자와 친해지려는 듯 13세에 학교를 졸업하고, 13개의 오페라를 쓰고, 13명의 부인을 사랑했듯이 용해는 四자를 사랑하다 죽고 싶어진다. 그 모험을 즐기고 싶어진다.

갑자기 용해의 육신에 근력이 피어오른다.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기분이다. 날개가 펴진 모양이다. 그동안 접어둘 수밖에 없던 날개가 어느새 펴진 모양이다. 용해의 날개는 용해가 펴고 싶대서 펼쳐지는 날개가 아니다. 용해의 능력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활개活開, 용해는 그 무의지적인 작용을 운명이라고 여겨왔다. 때문에 용해는 함부로 살아온 것의 결과물인 불행을 후회하지 않는다. 고통이라고 명명해온 그 자위책을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고통의 백그라운드는 허무여서, 진리와도 같은 허무여서, 걱정할 게 아무 것도 없다.

 

저작권자 © 양평시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