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윤례 소설가 우리들의 소확행

거의 한 달가량 대상포진으로 고생을 했다. 병원에서 처방해준 감기약을 먹던 중 쌀 톨 만한 분홍색 반점이 생겨서 약 알레르기인줄 알았다. 마침 설날 연휴 때여서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속으로만 혼자서 꾹 참고 있었다. 정확히 어느 부위인지도 모르는 곳을 날카로운 칼날로 잡아당기는 통증이 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입덧 하는 것처럼 모든 것에 냄새가 나서 물도 마시기 힘들었다.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자니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죽음의 공포가 밀려왔다.

내 상태를 모르는 가족들은 영화를 보러가자고 했다. 기분전환도 할 겸 따라나섰다. 명절인데 맛있는 것도 못해줘서 미안하던 참이었다. 재미있게 영화를 보고 따끈한 군고구마를 사먹으니 기분이 좀 나아졌지만 간헐적인 통증은 여전했다.

대상포진은 아주 서서히 낫고 있었다. 여전히 입맛이 없고 기운도 없었다. 마스크를 쓰고 목도리로 꽁꽁 싸맨 채 터덜터덜 걷다가 C샘을 만났다. 10년짜리 예금을 남편이 죽자 10년 후까지 살아있을 것 같지 않아서 해약하고 해마다 1년짜리로 다시 넣었는데 이번에 예금 이율이 1프로대로 떨어졌다며 울상이다. 팔순이 다 되었는데도 소녀처럼 시도 쓰고 춤도 열심히 추러 다니는 분이다. 남편의 유언이 1년만 슬퍼하고 그 다음부터는 행복하게 살라고 했다는데 오늘은 슬퍼 보인다.

먹고 싶은 게 없는데도 점심을 먹으러 소머리국밥집으로 들어갔다. 식당 주인이 꼭 친정엄마처럼 반갑게 맞이해주신다. 자리에 앉자 손가락은 나았느냐고 물어본다. 나은 손가락을 보여주고 웃는다. 손가락 다친 날도 밥을 먹으러 왔었다. 책상 위 깨진 유리판에 약지 손가락 살점이 떨어져나가 꿰맬 수도 없어서 약국으로 달려갔다. 약 한통을 들이부어도 지혈이 되지 않아 밴드를 바른 위로 피가 계속 새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아플 때면 이 식당에 온다. 몇 년 전 부모님이랑 새벽에 세미원에서 연꽃을 구경하고 이 식당에서 소머리국밥을 맛나게 먹었던 적이 있다. 아프면 추억을 먹으러 오는 걸까. 옆자리에서 식사하던 사람 중 한명이 나가면서 내 식대까지 계산을 하고 나간다. 안면이 있지만 동행이 있길래 일부러 아는 척도 안했는데. 생각지도 않은 공짜 밥을 먹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식당에서 막 나와 걷고 있는데 “빵”하는 클랙슨 소리가 나서 뒤돌아보니 E샘이 타라고 한다. 요즈음 거리에 차도 별로 없고 사람도 잘 안 다녀 길이 텅텅 비었는데. 장날마저 썰렁하던데. 반가운 지인들을 만나니 점점 기분이 더 좋아진다.

그때 F샘에게 전화가 왔다. 대상포진이 엄청 아파서 죽을 수도 있는 병이니 잘 먹어야 된다면서 저녁에 장어를 사주겠다고 한다. 헉, 진짜 계 탄 날이다. 저녁에 장어집에 나란히 앉았는데 F샘은 배가 별로 안 고프다며 마지막 장어 몇 조각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내 앞에 놓아주었다.

웃으면서 요즘 코로나 땜에 난리던데 젓가락으로 집어주느냐고 했더니 F샘은 맛있는 것을 사주고도 야단 듣는다며 활짝 웃었다. 그녀가 선물로 준 마스크를 끼고, 그 모습이 우스워 마주보며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 웃다보니 그동안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도 덩달아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그동안 참았던 울음을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친정엄마가 잘 먹고 빨리 나으라며 보내온 찰밥과 사골국물, 겉절이와 갈비찜 앞에서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참 운수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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