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례 사계절 정원 이야기

우리말은 참 쉽다. 식물을 꺾어 꽂으면 꺾꽂이라 부르고 물에 꽂는 걸 물꽂이라 하며 휘어 흙에 묻으면 휘묻이라 부른다. 굳이 한자로 삽목, 접목, 취목이라 하지 않아도 된다. 다행히 물꽂이란 단어는 한자어가 없다. 그냥 물꽂이라고 부를 수 있어서 좋다.

겨울이면 나는 물꽂이를 시도하곤 한다. 줄기를 칼로 잘라내 이 빠진 컵이나 밥주발에 담가 두고 열흘에서 길게는 한 달 정도 진드근하게 기다리다 보면 식물은 제 혼자 뿌리를 내리며 살아갈 준비를 마친다. 어미 식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위한 준비기간 동안 식물은 몸살을 앓기도 하지만 대개는 용케 살아남는다.

로즈마리를 물꽂이로 키우고 있다.

올 겨울은 유난히 번잡하고 분주한 겨울이 될 것이다. 작은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큰 아이와 같이 살 방을 얻어줘야 했기에 심란했고 그럴듯한 방을 얻어주지 못함에 부모 된 심정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더랬다.

방을 얻고 집에 돌아온 날 작은 아이는 내게 율마와 로즈마리를 심어달라고 했다. 율마는 키우기 난이도를 따지자면 최상 정도 된다는 것을 알기는 할까. 뭐든 마찬가지겠지만 식물을 잘 키우려면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그래야 다 죽어가는 식물도 살릴 수 있는 재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율마는 그렇더라도 로즈마리를 키우고 싶다니 기특하다.

로즈마리를 키워 어떻게 하면 요리에 넣어 잘 먹고 살까 고민을 하는 자식을 두고 입 짧은 자식 배곯을까 괜한 걱정을 했으니 자식을 몰라도 한참 모른 셈이다. 못 먹어도 안 먹어도 먹는 것에 대한 고민은 입 있고 똥구멍 있는 자들의 영원한 화두가 아니더냐고 항변하길, 모성본능에 너무 충실했나 보다.

나는 현재 싱고니움과 스웨디시 아이비와 형광스킨답서스 물꽂이를 하고 있다. 이중에 형광스킨답서스를 심어 아이의 이삿짐에 넣어 주려고 한다. 일산화탄소 제거 능력이 있으니 주방에 두라고 일러줄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살라고 하는 잔소리는 이제 머리가 다 큰 자식한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익히 알고 있다. 앞으로 식물 키우는 방법이나 소소하게 알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는 게 술술 풀리면 얼마나 좋을까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살이이기에 식물 줄기를 잘라 꽂으면 저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나는 것을 보면서 지치고 힘들 때 살아 갈 용기를 냈으면 하는 부모로서의 소망을 품어본다.

형광스킨답서스를 물꽂이 후 화분에 심었다.

자식들이 다 컸으니, 좀 더 한적한 곳에서 살아볼까 싶은데 두려움이 밀려온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한양에서 한 나절 거리 이상 떨어지는 걸 꺼려했다고 한다. 임금한테 내쳐졌어도 임금이 부르면 한나절 안에 당도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어 멀리 가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문득, 지척에 다산 생가가 있음이 떠오른다. 다산도 정조가 불렀을 때 배를 타고 두물머리를 지나 팔당을 거쳐 두모포와 송파나루에 한나절 안에 닿았겠지.

그 옛날 정조가 노론세력의 압력에 굴복해 어쩔 수 없이 다산을 내친 뒤 다산에게 서찰을 보냈다는데 그 음성이 낙낙하게 들리는 듯하다.

‘주제소의 벽을 발라 아직 마르지 않았으나 조금만 기다려라. 덜 말라 정갈하지는 않아도 그믐께면 경연할 수 있겠다. 그때 보자꾸나.’ 얼마나 다산이 그리우면 정감 있는 말로 다산의 입궁을 친히 알리며 재촉했을까 싶다.

누가 나를 잡아끈다고 서울에서 멀리 가는 게 두려워지는 걸까? 행여 자식들과 멀어질까, 자식들이 나중에 찾아오기 어려울까봐 주저하는 마음이 생기는 건 아닌지 나를 돌아본다.

자식이 성인이 되면 부모에게 경제적, 정신적 독립을 해야 하듯 부모도 자식에게서 정신적 독립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처지에 이 무슨 사고의 모반을 꾀하는지 모르겠다.

에라이, 이 사람아 정신 차리소. 이제는 부모인 당신이 독립을 할 차례일세그려.

단호한 혼잣말로 올 한 해를 갈무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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