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어렸을 때는 고통을 즐긴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산에 다니면서 그 말이 뭔지 이해했습니다. 다리가 저리고 숨이 차서 눈앞이 노래질 때쯤이 지나고 올라온 걸 후회할 때… 가끔은 그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정상을 밟고 난 후에 그 말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복잡하고 머리 아픈 ‘먹고 살기’를 잠시나마 멈춘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나 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산에 올라가다 다리를 다쳐 목발의 도움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유일한 삶의 낙이 없어졌습니다. 나이 탓인지 쉬이 낫지도 않는 거 같습니다. 마음이 답답합니다. 목이 칼칼해지고 폐까지 시원해지는 겨울 산바람만 생각이 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비슷한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저도 입병 때문에 고생하고 있습니다. 강의가 직업이다 보니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목과 입이 주기적으로 말썽입니다. 나이 탓인지 이번은 말하기도 힘들게 아프더군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번 입병은 올해 강의가 끝난 다음날 시작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기온은 영하로 내려가고 아주 뜨겁고 칼칼한 김치수제비가 머리 속을 왔다 갔다 합니다. 당장 먹고 싶지만 그 후에 생길 일이 두려워 결국 죽으로 연명하고 있습니다. 몸관리라는 핑계를 대고 싶지만 오늘 소개하는 작가의 용기를 보고는 약간 위축되었습니다.

작가는 임상경력 30년의 나무 의사 우종영입니다. 그는 30대에 산에서 굴러 무릎 연골이 파열되었습니다. 나무병을 고치는 직업이니 계속 산을 오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50대 중반에 양 무릎을 다 수술을 하고 두 계절 동안 산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아파트 창문으로 보이는 북한산 자락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수술을 받고 집에 있으면서 내가 깨달은 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이었다. (…) 신록의 잎끝을 붉게 물들이는 나물을 바라보며 결심했다. 목발을 짚고 지리산을 종주해보자.

어차피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 남들 열 걸음 걸을 때 나는 한 걸음 걸으면 될 일.(…) 대원사에서 시작한 첫날의 산행은 치밭목 산장에서 끝이 났다. 보통 사람의 걸음으로 서너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였지만 나는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쉬지 않고 걸은 뒤에야 겨우 산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뉴스에 나올 만한 일입니다. 목발 짚고 지리산 종주라니요. 이 남자에게 감정이입을 조금 해보았습니다. 평생 산을 다니던 50대 중반의 나무의사가 양무릎 수술을 받았다면? 완벽한 좌절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산은 다 올라갔다고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그는 주어진 조건에 삶의 근거를 찾아냈습니다. “전처럼 높은 바위를 오르거나 경사진 곳에서 내달리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수술을 받기 전보다 훨씬 더 자유로워졌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든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척도는 내게 달렸고, 정말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의 지리산 종주는 만용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무서움에 지기 싫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목발로 노고단 정상에서 떠오르는 해를 본 우종영은 ‘해보지 않고는 모른다’는 경험론자가 됩니다. 아마 질문하신 분도 그 부분이 제일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다신 산에 못 오르는 것이 아닐까?’ 아마 남몰래 눈물을 훔쳤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에 빠져 본 사람만이 아는 그 무엇이 있거든요. 우종영의 답은 명쾌합니다. “못한다고 말하기 전에 딱 한걸음만 나아가 보자고. 때론 그 작은 한 걸음이 답일 때가 있다고.” 뭐 다 아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목발 짚고 노고단 정상에 오른 사람의 깨달음이라면 그 무게가 다르지 않을까요?

‘먹고 살기’가 버거우면 올랐던 산. 그 산을 오르는 것도 버거우면 우종영이 쓴,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를 읽어보세요.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도 언제보아도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나무같은 명문장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무에게 있어 버틴다는 것은 주어진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 내는 것이고, 어떤 시련에도 결코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버팀의 시간 끝에 나무는 온갖 생명을 품는 보금자리로 거듭난다.”

글을 끝내기 전에 걱정되어 말씀 드리지만 지혜는 지혜로 만족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목발을 짚고 산에 가는 일은 피하시는 게 좋습니다. 물론 저도 칼칼한 김치 수제비를 포기하겠습니다. 그럼 쾌유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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