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만 잔아박물관장 소설가

김용만 잔아박물관장 소설가

출생지는 아니지만 나는 거침없이 ‘우리 양평’이란 표현을 쓴다. 서울에서 이주해와 터를 잡은 지 30년 가까이 되고, 서종면 문호리 집에서 오직 글만 써오다가 10여 년 전에 잔아박물관을 설립하여 운영해온 그 관계항(關係項)이 양평에 대한 애정으로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럼 고향이 되다시피한 우리의 양평을 어떻게 가꿔야할까? 아름다운 꽃밭으로 가꿔야할까? 번화한 도시로 가꿔야할까? 평화로운 안식처로 가꿔야할까? 부유한 땅으로 가꿔야할까? 진실된 땅으로 가꿔야 할까? 그렇다. 이 중에서 한 가지도 버릴 게 없다. 다만 아름다운 꽃밭, 번화한 도시, 평화로운 안식처, 부유한 땅, 진실된 땅으로 가꾸기 위해서는 그것들 밑바닥에 지성이 깔려야 된다는 말이다. 누구나 자식이 지성인이 되기를 바라듯, 문화의 전당이 되어야 할 양평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여기에서 지성을 강조하는 것은 유식해지라는 말이 아니다. 글을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리고, 학식을 높이라는 말이 아니다. 문화적인 정서와 의지를 피와 살로 체질화시키자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 그 지성이 무너지는 것만 같아 슬프다. 아무렇게나 흉내만 내면 된다는 그런 몰지각한 탐욕이 진실되고 우아한 양평의 지성정신을 오염시키고 있다. 문화활동이란 명목으로 요란스럽게 떠들고 그 소란을 이기적인 세력 확장의 도구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필자의 전공분야인 문학만 해도 그렇다. 나는 오랫동안 양평에 거주하면서 오직 문학의 질적 향상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온 사람이다. 사재를 축내면서 학생들 교육을 지도해온 바보 같은 사람이다. 언어를 매체로 삼는 문예창작의 가장 으뜸 덕목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겸손과 양보와 홀로 외롭게 몸부림쳐야 하는 고통스런 자기 성찰이다. 그래서 더더욱 창작인은 고요한 침묵을 가장 보배로운 가치로 여겨야 한다. 고통을 즐겨야 하는 지성, 그래서 창작인은 그 지성을 운명적인 업보로 삼아야 한다.

지성의 세계는 솔직한 곳이다. 정직한 곳이다. 거짓말을 않는 곳이다. 모함하지 않는 곳이다. 싸워도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곳이다. 순결한 영혼들의 세계이다. 썩지 않는 곳이다. 외로운 곳이다. 약고, 눈치 빠르고, 간교하고, 빈틈없는 자들의 활동무대가 아니다. 다시 말해 야비한 잔꾀가 통하지 않는 양평이어야 보배로운 양평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다음은 필자의 ‘죄와 야비’에 대한 소회이다.

죄(罪)와 야비(野卑)는 다 같이 타락의 일종이면서 본질은 판이하다. 죄의 색은 검고 흰 단색밖에 낼 수 없지만 야비의 색은 천연색과 같아서 자유자재로 변색할 수 있기 때문에 화려한 미덕의 색을 잘 흉내낼 수 있다. 그래서 야비는 진실한 척, 겸손한 척, 의리 있는 척하고 잘 속일 수 있기 때문에 악 중의 악이요 독 중에서도 지독(至毒)이다. 야비가 죄보다 더 해롭다는 말은 바로 그 때문이다. 죄는 법으로 옭아맬 수 있지만 야비는 법망이란 그물로도 씌울 수 없어 더더욱 해롭다. 공자도 “그럴듯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을 싫어한다(惡似而非)”고 했지만 거짓이면서도 참인 척인 것, 범죄이면서도 법으로 다스릴 수 없는 것이 야비다. 오염되었으면서도 순수한 척하는 것, 가해자면서도 피해자인 척하는 것이 야비다. 죄를 지으면 형벌이란 매를 맞지만 야비한테 걸리면 사람이 미치고 만다.

다시 말하자면 문화의 고장인 양평에서 가장 보배로운 것은 지성을 아끼고 지성에서 보람을 찾는 지성정신이다. 학생도 그렇고, 학생을 사랑하는 부모도 그렇고, 문화인도 그렇고, 농민도 그렇고, 상인도 그렇고, 공무원도 그렇고, 정치가도 그래야 한다. 우아한 지성, 진실된 지성의 향기가 풍기는 양평을 상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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