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윤례 소설가

지난 주말, 나는 아버지를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뵈었다. 부모님이 오랫동안 사셨던 광주 월산동을 3년 전에 떠나왔는데 마침 그 동네가 도시재생사업에 선정되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 빈집이 늘어나고 오래된 집에 사람보다 달팽이가 더 많이 살던 동네였다. 무너지거나 금이 간 담벼락에 예쁘게 그림을 그리고 새단장을 해서 축제를 한다고 했다.

시인 네 명이 ‘달뫼마을 사람들’이라는 기획사업으로 역사, 인물, 자원을 소재로 마을 스토리를 제작한다고 했다. 그곳에서 아버지가 선정되었으니 아버지에 대한 자료를 좀 보내달라고 했다. 아마 20년 넘게 통장 일을 하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베풀고 도우며 동네 해결사 노릇을 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내가 사보나 사사를 집필하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 취재하고 인터뷰한 이야기를 해드리면 아버지는 나를 ‘우리 작가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이야기도 나중에 꼭 책으로 써달라고 하셨다. 그때마다 나는 빙긋 웃기만 했는데.

맏이인 나는 동생들과 터울이 많이 나서 어린 시절 외동딸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는 몸이 약한데다 동생들을 보살피느라 늘 바빴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잘 그치지 않은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면 금방 그쳤다고 한다.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부터 도깨비 이야기, 서당 다니던 이야기, 군대이야기 등 끝도 없이 해주셨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시골에 살았는데 학교에 가려면 십리를 걸어가야 했다. 동네 이장이었던 아버지는 가끔 면사무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학교가 끝나면 업거나 목마를 태워 다른 동네에 놀러가셨다. 집에 오면 화로에 밤을 굽거나 고구마를 납작하게 잘라서 석쇠에 노릇하게 구워 주시곤 했다. 장날이면 건빵과 눈깔사탕을 사 오셔서 아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내가 책 읽는 것을 좋아하자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면서 책을 못 읽게 숨기셨다. 여행을 다녀오면 꼭 엽서와 기념품을 선물로 사오고 풍성한 이야기 보따리까지 풀어놓으셨다. 어느 날 우연히 서랍에서 아버지의 유서를 발견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아버지가 앞집은 남동생에게 주고 뒷집은 나에게 준다는 내용이었다. 궁금해서 물어보았더니 맏이니까 부모처럼 동생들을 보살피고 가르쳐야 된다고 했다.

중학생이던 여동생이 패혈증으로 갑자기 죽자 그동안 평화로웠던 집안 분위기는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아버지는 거의 매일 술을 드시고 집안은 조용한 날이 없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드는 생각이 아버지는 그때 울고 싶으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그때 얘기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가장으로서 표현도 못하고 혼자서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서 술의 힘을 빌리셨던 걸까? 아버지가 일곱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큰집에서 자라다가 하나밖에 없는 형의 죽음까지...

대학 졸업 후 타온 첫 월급을 그대로 드렸더니 거기에 돈을 더 얹어서 집에서 경리로 일하던 야간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에게 월급을 주었다. 3년 동안 들었던 재형저축을 타서 부모님께 드렸더니 그걸로 차를 사서 시골을 왔다 갔다 하시며 즐거워하셨다. 시간이 흐르자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가는 듯했다.

2년 전 아버지가 고관절을 다치셨는데 폐렴까지 와서 안 좋은 상황이었다. 주변사람들은 연세가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평소 건강하고 강인하신 아버지는 다행히 잘 이겨내고 재활치료를 통해 건강을 회복하셨다. 중환자실에서 막 나와 아직 의식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의사가 나를 가리키며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하나님의 첫 선물”이라고 하셨다. 늘 건강하고 활기찬 아버지를 어쩌면 못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에 불안하고 힘들었는데 그때의 감동은...

인터뷰를 마치고 소고기를 구워 아버지 수저에 놓아드리니 어린 시절 아버지가 수저에 조기를 얹어주시던 생각이 문득 나면서 행복감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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