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화재> 옥화재 양평문협 이사

옥화재 양평문협 이사

조금씩 빗방울이 흩날린다. 먼지가 폴폴 날리도록 가물더니만 하필이면 김장하기로 정한 날 흐림, 비가 오는 곳도 있겠다는 예보다. 기어이 비가 온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더니 잠깐 사이에 온몸이 꿉꿉해진다. 한참을 망설였지만, 이것저것 생각해서 잡은 날이라 예정대로 배추를 뽑기 시작했다. ‘내일 오전 맑음, 강수량 0%’라는 예보를 믿기로 한 것이다.

양을 줄였는데도 늘 해오던 대로 저녁 여섯 시쯤에 배추를 절여놓았다. 자정쯤에 한 번 뒤집어 놓고 설핏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창밖이 대낮같이 환하다. 깜짝 놀라 창을 열었더니 달빛이다.

아름다운 풍경에 이끌리어 두 발이 저절로, 춤추듯 마당으로 미끄러져 내린다. 쪼르르 그림자가 다가와 나를 끌어안는다. 나는 달빛에 입 맞춘다. 잎이 진 감나무 가지가 나신을 담벼락에 누이고 떨어져 누운 단풍잎과 마른 잔디도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기온이 쨍하니 낮았으면 더 아름다웠을 그림, 그러나 이대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달빛풍경을 혼자 보기가 너무 아깝다. 염분 줄이기에 열을 올리는 중이어서 너무 절여졌을까 염려하며 배추를 만지니 알맞게 휘어진다. 겨우 스무 포기인 배추를 씻는 일이 두 사람 분량은 아니지만, 함께 그림자놀이가 하고 싶어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양평에서 살아온 십여 년 동안에 우리는 달밤이면 가끔 행복한 그림자놀이를 했다. 잔설에 누운 매화그림자와는 그저 바라보며 은근한 매화 향에 취했었지만, 만개한 배꽃 그림자 앞에서는 달을 향해 은빛 세레나데를 불렀었다. 손주 셋이 모두 모인 어느 날이면 아이 어른 없이 온 식구가 마당을 가로지르며 그림자 밟기를 하다가 신명이 오르면 둔한 내 그림자까지 어우러져 춤판을 벌이기도 했었다. 흐린 날씨 탓에 오늘이 보름인지, 육십팔 년 만에 떠오르는 ‘슈퍼 문’인지도 몰랐었는데 절여놓은 배추 덕분에 한밤중에 크고 맑은 달을 만나 둘이서만 그림자놀이를 하려는 것이다.

아이들 김장까지 해서 보내는 일이 힘에 부쳐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시작했더니 달빛이 기운을 보태려 깨웠나 보다. 두 그림자가 우물가에서 배추를 씻는다. 몸이 움직이는 대로 달빛이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섬세한 표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허리를 굽히고 펴는 몸짓이 분주하다. 잔디밭에선 달빛에 흠뻑 취한 빨랫줄이 바람과 한 몸이 되어 노닥거리고 있다.

앞으로 십팔 년이 지나야 이번만큼 큰 달을 볼 수 있단다. 십팔 년 후의 달을 우리가 만나리라는 기약은 없다. 그때도 오늘처럼 달빛만으로 배추를 씻을 수 있다면 김장을 해서 아들네로 딸네로 보내고 싶지만 글쎄다. 점점 떨어지는 체력을 염두에 두어 뭐든 할 수 있을 때 즐겁게 해야 하겠다는 것은 머릿속 생각일 뿐이다. 실제는 게을러 핑계만 둘러대는데 달빛이 그림자놀이로 말을 걸어와 마음을 토닥이더니 다시 채근한다.

빛이 정수리 위에 있을 때는 그림자가 짧다. 그림자가 길게 남는다는 것은 남은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나간 시간이, 여럿이 만들었던 달밤의 그림자놀이가 자꾸만 생각나는 모양새가 요즘 내가 많이 외로운가 보다. 이틀이 지나 달이 살짝 이지러졌는데도 달빛은 여전히 밝아서 나를 유혹한다. 곤히 잠든 남편을 깨울 수가 없어 혼자 마당으로 내려서려는데 갑자기 가슴이 아려온다. 순전히 달빛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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