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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쌓인 겨울 같은 에세이

Q. 잠깐이네요. 좀 전에 막 겨울옷을 꺼내서 옷장에 정리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겨울이 온 것 같아 급하게 한 일입니다. 이제 애들 방학도 오겠죠? 겨울 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짬이 날 때마다 읽어볼만한 책 있을까요? 엄마한테 방학은 일종의 전쟁이라 평화(?)시기에 읽어볼만한 책 소개해주세요.

A. 저도 얼마 전에 옷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곧 환절기를 알리는 비염이 찾아왔습니다. 오늘은 저만의 명품 에세이 한 권을 알려드립니다. 나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겨울맞이 에세이’로는 아주 충분할 것 같습니다. 제목에도 겨울이 걸려있습니다.

소설가 한지혜가 쓴 에세이 <나의 살던 골목에는 참 괜찮은 눈이 온다> 입니다. 그녀의 글은 3박 4일 내려 쌓여있는 눈 같습니다. 온 세상이 윤곽만 남아있습니다. 한지혜는 폭설을 치우기 위해 햇빛 아래로 걸어나온 소녀처럼 눈을 걷어냅니다. 그 속에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집과 골목과 거리와 도시의 장면들. 나의 살던 고향은 꽃과 나무가 있지만 그녀가 살던 골목은 도시의 가난한 한 켠입니다.

가난을 머리속에 새긴 사람들은 한지혜 작가처럼 단호하게 말합니다. “지나고 나면 슬픔은 더러 아름답게 떠오르는데, 기쁨은 종종 회한으로 남아 있다.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는 내가 버텨온 흔적이 있고, 기쁨이 남은 자리에는 내가 돌아보지 못한 다른 슬픔이 있기 때문이리라. 내가 살아온 자리도 돌아보면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갈 마음은 조금도 없다. 내가 살던 개천은 오래전에 복개되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나는 그 사실이 가끔 다행스럽다.”

그럼에도 이 슬픔의 순간에 그녀를 행복하게 했던 것은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이었고 소공녀였습니다. 책이 가진 여러 기능 중에 하나는 상상력이라고 합니다. 상상력은 현실에 대한 부정을 기반으로 합니다. 현실에 만족한다면 상상할 필요는 많이 줄어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책은 도피의 기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한지혜의 도피처는 책입니다. 머리속의 집은 저택이었습니다. 하지만 한지혜는 딱 짤라 말합니다.

“책을 좋아한다는 건 성공에의 예감 같은 걸 전파하는 법이다. 내가 책에 빠져 있는 건 아빠에게도 자랑이었지만 엄마에게도 그랬다. 나는 책을 통해 현실에서 도피했는데, 엄마와 아빠는 책을 좋아하는 나를 통해 미래로 도망가고 싶어했다.”

여지없습니다. 겨울의 찬바람처럼 자신의 삶에 조금의 꾸밈도 넣지않는 한지혜. 영하 10도. 따뜻한 방을 나와 집밖에서 몸을 움츠리지만 입안으로 드는 한기에 상쾌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동정 대신 그녀가 추천하는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은 모른다는 것에 대한 인정입니다. “경험이 누군가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고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해 준다면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의 삶이지 타인의 삶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누군가를 위해 고민하고 있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첫마디는 ‘나는 너를 모른다여야 할 것이다.’” 나의 훌륭함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을 만나지 말라고 경계하는 그녀의 말속에 담긴 애정입니다. 타인을 판단하는 편견과 오만을 갖지 말라고 말하는 그녀의 애정은 인생 곳곳에서 튀어나옵니다.

겨울같은 에세이. 세상 제일 불만 많은 소녀의 넋두리가 눈꽃처럼 곳곳에 피어오르지만 그녀에게 세상은 살아갈 이유를 찾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 이 책을 읽으며 몇몇 구절을 가져다 제가 사는 이유로 만들었습니다. 

양평시민의소리  webmaster@yp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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