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설악산에 가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바다가 보고 싶었다. 동해 바다에 가서 물 회 한 접시 먹고, 메밀꽃 필 무렵이니 오는 길에 봉평에 들러 메밀전에 동동주 한사발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떠난 여행이었다.

바다가 한눈에 펼쳐지는 숙소에 도착하자 마치 배안에 있는 느낌이 들면서 해피바이러스가 온몸으로 퍼졌다. 모든 게 환해지며 그것 하나로 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여정들이 활짝 펼쳐지며 물에 씻기는 듯했다.

대포항에는 막 넘어가기 시작한 해가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파도에 살짝살짝 흔들려 춤추고 있었다. 일출을 보러 왔는데 생각지 않은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붉은 노을을 보며 항구를 몇 바퀴나 돌다가 바닷가를 따라 걸으니 설악항이 나오고 해맞이공원이 나왔다.

다음날 아침, 비가 조금 내렸다. 일출은 볼 수 없었다. 바닷가를 따라 양양이나 강릉으로 갈 참이었다. 그런데 설악산 입구가 보이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입구까지만 가야지 하고 가다보니 케이블카 타는 곳이었다. 이건 타야해.

비에 젖은 설악산은 안개 한 점 없이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황홀한 풍경에 넋을 잃고 감상하다보니 금방 도착한다. 우산을 쓰고 권금성에 올라가니 멀리 울타리처럼 둘러쳐진 울산바위가 보이고 바위들 너머 공룡능선도 보이고 수많은 기암절벽들이 보인다.

권금성을 내려와 그냥 가자니 좀 아쉬웠다. 신흥사까지만 갔다 와야지.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을 산책하듯이 걸었다. 금방이었다. 그렇다면 수학여행 때 가본 흔들바위까지만 가보자.

한차례 내린 폭우로 부러진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바닥에 수북했다. 꺾어진 나뭇가지는 사람들 발길에 가루가 되도록 부서져 향기로운 나무냄새가 진하게 풍겨났다. 향에 취해 걷다보니 비가 그치고 햇볕이 쨍쨍 내리쬐기 시작한다. 우산을 지팡이 삼아 오르니 흔들바위가 나왔다. 이제 그만. 그런데 눈앞에 병풍처럼 펼쳐진 울산바위가 우뚝 서있다. 참 정갈하고 잘 생겼다. 도저히 그냥 갈 수 없었다. 가파른 길을 오르니 전망대가 나왔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가보자.

그런데 이제까지와는 완전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 계단들이었다. 나무계단, 돌계단, 철계단. 그리고 외국인들이 부쩍 많아졌다. 산을 자주 가거나 등산가들에게는 별로 힘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몇 번이나 그만 내려가야지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힘들었다. 내려가려고 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힘을 주고 갔다. 힘내세요, 조금만 더 가면 돼요, 파이팅, 리틀리틀, 클로스, 니어니어!

그러다보니 어느새 몇백미터 남지 않았다. 발아래 계단사이로 난 구멍이 낭떠러지 같았다. 멀리 바라보면 비행기를 타고 있는 것처럼 황홀했지만 시선이 가까이 올수록 무섭고 아찔했다. 올라가는 사람도, 내려오는 사람도 없었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올라왔나 후회도 했다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대견하기도 했다. 이왕 온 것 씩씩하게 올라가자 마음먹고 오르니 정상에 도착했다.

바다로 가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산에 왔다. 케이블카만 타고 내려가야지 했는데 흔들바위까지, 조금만 더 올라가야지 하다가 결국 울산바위 정상까지 올라왔다.

문득 삶도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대 때, 20대 때, 지금의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살다보니 전혀 예기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 대견하다가도 어쩔 땐 한없이 후회스럽고, 이 세상에 덩그마니 나 혼자인 것 같다가도 어쩔 땐 더없이 가슴 벅차오르고.

행복이든 불행이든 널려 있다. 내가 행복을 주울 수도 있고, 불행을 주울 수도 있다. 물 흘러 가는대로 흐르다가 줍고 싶으면 주우면 될 걸. 그걸 지나쳤다고 안타까워하고 뒤돌아보며 후회하고 어리석을 때가 참 많았다. 흐르게 놓아두면 또 다른 게 다가올 것을...

바위틈에서 다람쥐 한 마리가 놀고 있다가 빤히 쳐다본다. 줄 게 없어서 마냥 미안하다. 혼자 재롱을 떨다가 바위틈으로 사라져버린다. 힘든 것도 잊어버리고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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