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운동 100주년에 바라보는 한일관계

* 지난 4일 일본 오사카에서 오사카 시민연대 주최로 <북미 어떻게 되나, 일본은 어떻게 하나, 조선반도의 지금>을 주제로 대담회가 열렸다. 이부영 회장의 강연 내용 전문을 싣는다.

이부영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회장

1. 들어가는 말 

한국이나 일본이 한여름 더위에 허덕이는데도 한일관계는 꽁꽁 얼어붙어 있다. 걱정스런 마음으로 이 강연에 왔다. 올해 연초부터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준비로 한국에선 바빴다. 동학농민들과 의병들에 대한 탄압 그리고 무자비한 무단통치를 뚫고 망국 10년 만에 일어난 3.1독립운동은 100년이 지난 오늘 생각해도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무력과 회유-분열에 아무런 힘을 모을 수 없을 것으로 보였던 조선 민중이 그처럼 대규모로 평화적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드러낼 줄은 일본의 식민지배자들 뿐 아니라 조선인 자신도 몰랐다. 100년 전의 큰 사건을 우리는 지금도 공부하고 있으며 생각하고 있다.

미국의 저명한 언어학자이자 비판적 지식인인 노엄 촘스키 MIT 원로교수는 올 4월 11일 그의 고향 보스턴의 올드 사우스 교회에서 인류와 세계의 운명을 걱정하는 뜻 깊은 연설회를 가졌다.

그는 지금이 1939년 스페인전쟁의 막바지 공화파의 근거지 바르셀로나가 프랑코 파시스트에게 함락 당하던 80년 전 세계 모습과 비슷하다고 회상했다. 나치의 프랑스 침공, 일제의 만주점령과 중일전쟁 감행 등 파시즘의 파도는 둑이 터진 듯 퍼져나갔다.

당시 미국무성과 미외교협회(CFR)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상황을 나치가 지배하는 대부분의 유라시아와, 서반구와 이전의 대영제국 그리고 극동지역을 지배하는 미국의 영역으로 상정했다. 그러나 1942년 파시즘 쓰나미의 저지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러시아가 나치에게 승리한 데서 시작되었다.

오늘날의 양상이 나치즘이 다시 일어나는 것은 아니더라도 트럼프-폼페이오-볼튼 삼두정치, 영국의 보리스 존슨의 총리취임, 일본의 아베 집권, 브라질의 볼소나로 등 라틴아메리카의 극우세력들, 서유럽의 극우정당들이 80년 전의 양상과 비슷하다.

핵전쟁의 위험을 제어해오던 구조도 약화되고 있다. 미국은 2002년 ABM협약에서 탈퇴했으며 트럼프가 최근 다시 중거리핵미사일(INF)협약에서 탈퇴하자 러시아도 잇따라 탈퇴했다. 이 협약들은 유럽을 비롯한 세계에서 핵전쟁의 위협을 억제해온 구조물이었다.

다음 위험은 구조적으로 화석연료를 대량생산하고 대량 소비해 지구온난화를 가속시키는 대기업과 금융자본의 작동이다.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작업이 자신과 지구를 종말로 다가가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 1월 과학자들의 지구 종말을 알리는 시계는 밤 12시 2분 전에 이르렀다고 알렸다. 우리가 잘 아는 두 개의 위협, 즉 핵전쟁과 지구온난화도 파국으로 향하고 있지만 또 다른 제3의 위험이 커지고 있다.

민주주의의 파괴다. 핵전쟁과 지구온난화라는 치명적 위협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도 민주주의의 작동에 있다. 그런 치명적 위협들을 다스리려면 민주주의를 작동하게 만드는 수단들이 살아 있어서 대규모 대중 압박이 가능하며 그래야 공적 혹은 사적 주요 제도들을 움직여 그런 위협들을 제어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노엄 촘스키 교수 말대로 “지금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다!”

촘스키 교수의 시각으로 동아시아를 바라본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 그늘이 드리워진 동아시아에서 주요과제는 한반도 비핵화다. 진행 중인 조미 비핵화 협상은 한국의 협력과 함께 성공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일본의 협력이 필수적이지만 아베의 일본은 한반도 분단극복과 평화에 긍정적 역할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한국은 군사독재를 거쳐 80년대에 6월 민주항쟁과 서울 올림픽을 거치면서 90년대 후반 김대중-오부치 파트너십선언으로 한일관계의 최고정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 일본에서 평화헌법 9조의 파기와 ‘전쟁할 수 있는 나라’ 일본을 지향하는 아베 총리가 집권하면서 한일 양국에서는 가치의 충돌이 일어났다.

민주화운동을 통해 정권교체를 성취하고 비록 핵위기가 지속되었지만 남북관계 개선에도 진전을 보인 한국과는 대조적으로 일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가치관이 전면에 등장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과 중국의 등장도 일본의 보수화를 자극했다. 한반도의 화해와 교류-협력 등 현상변화 기류도 일본의 불안을 야기하면서 일본을 자극하고 있다.

한반도 비핵화도 성취해야겠다. 지난 70여 년 유지되어온 일본의 평화도 지켜져야 하겠다.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키려 애써온 시민운동과 일본에서 평화헌법 9조와 민주주의를 지켜온 시민운동은 협력하고 연대해야겠다.

이 강연원고를 작성하고 있는 시기에 발표된 “한국은 과연 ‘적’인가“ 일본 지식인 성명은 한국 사회에 큰 반향과 동의를 불러일으켰다. 일본 사회 안에서 正論이 제기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신선하다. 역시 전후 민주주의와 평화의 가치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보여줬다.

 

2. 1965년 한일협정을 어떻게 봐야할까.

한일협정의 본체인 샌프란시스코 미-일 강화조약이 1951년 9월에 체결됐다. 한국전쟁 중이었으므로 분단된 한반도는 초청받지도 못했고 참여할 길이 없었다.

미국과 일본이 강화조약 내용을 논의하는 데 한국이나 한반도의 목소리는 무시당했다. 문제의 한일협정 제2조도 이 강화조약에서 미-일 간에 양해사항이었을 것이다. 독도는 한국의 영토에서 배제 당했다.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1965년 한일 간에 체결된 한일기본조약 제2조는 1910년의 한일병합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있지만 2조의 한일 간의 해석이 대립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 측은 병합조약이 본래 폭력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무효이며 한국의 동의에 의해 맺어진 것이 아니고 강요된 것으로 해석해왔다.

일본의 해석은 합병조약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때까지 유효하며 양국의 합의에 따라 일본은 한국을 병합했기 때문에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도 사과도 할 의향이 없다는 것이었다.

1965년 한일협정은 체결 당시 박정희 정권에 대한 거센 저항 때문에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체결됐다. 2004년 한국의 민족문제연구소는 비밀 해제된 1966년 3월 18일자 미국중앙정보국(CIA) 특별보고서 ‘한일관계의 미래’를 발굴했다.

6개의 일본 대기업들이 1961~65년 한일협정 협상을 벌이고 있는 동안에 당시 박정희 정권의 신생정당 민주공화당 총예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제공했다. 기업 당 100만 달러에서 2000만 달러에 이르렀다. 달러의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지금의 약 20억 달러 이상에 해당한다. 공화당 창당에서부터 대통령선거, 총선거 자금으로 충당된 비자금이었다.

박정희 정권과 일본 기업들 사이의 거래는 박정희 만주군 복무 당시 그의 상사들이었던 기시 노부스케, 세지마 류조, 고다마 요시오 등이 역할 했다. 당시 일본 자민당 정권은 한국 입장에서는 굴욕적인 정치적 정통성이 없는 친일 군사쿠데타세력으로부터 한일협정을 헐값에 사들인 것이었다.

한일협정 제2조의 치명적 내용뿐 아니라 협상과정의 부패상으로도 한국에서 거센 반대에 직면했다.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를 극복하고 한국이 민주화-남북화해 시대로 진입하면서 1991년 아사히신문의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처음 보도하면서 알려지게 됐다.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을 인정하고 사죄했으며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한 포괄적 사과도 이어졌다.

1998년 한국에서 정권교체로 김대중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김대중-오부치 파트너십 공동선언으로 한일관계 친선의 최고정점에 이르렀다. 2002년에는 김정일-고이스미 평양선언이 나와 조일수교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2010년 일본에서도 최초의 정권교체가 성사돼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간 나오토 총리는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한국인의 뜻에 반해 식민지 지배를 했다고 인정했다.

 

일본 시민운동의 중심인 평화포럼의 후쿠야마 신고 대표가 아베의 폭주에 대해 시민사회의 대응방침을 밝히고 있다. 앉은 순서 왼쪽부터 김광남(재일한국문제연구소장, 통역), 이부영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회장, 오카모도 아츠시 전 카이지 편집인, 하토리 요이치 오사카 시민연대 대표.

3. 드러난 문제점들

일본에서의 이 같은 역대 정권담당자들의 사실인정은 한국과 일본의 교류확대에 따른 양국민의 이해의 확산, 역사적 사실에 대한 대중적 인식의 확산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2006년과 2012년 아베 신조의 집권은 일본의 역대 총리와 장관들의 선언, 성명을 간단히 파기하고 전복하는 강력한 것이었다.

첫째, 지난 상당 기간 동안의 한일관계의 모든 것을 파기하고 전복하는 아베 신조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문제의 한일협정 제2조의 체결 당시 일본 측의 주장은 이렇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은 조선인의 요청을 일본이 받아들여 병합한 것이고 병합조약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까지 유효했던 것이므로 일본은 사과하고 배상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 역사가 날조되고 있었다.

둘째, 아베 정권은 일본회의라는 정치단체를 기반으로 형성된 권력이다. 이 단체는 일본 제국주의의 가치관, 즉 패전 이전의 영향력, 군사력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평화헌법의 폐기, ‘전쟁할 수 있는 나라’ 일본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셋째, 아베 신조로 대표되는 일본회의의 제1 목표는 메이지 유신의 정한론자이자 아베의 정신적 스승 요시다 쇼인이 그랬듯이 한반도를 목표로 한다.

넷째, 그들은 중국의 대륙굴기(大陸崛起)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가운데 한반도에서의 분단극복 분위기, 화해교류, 평화통일 노력에도 역시 위기감을 보인다.

다섯째, 일본 국민대중 속에서 헤이트스피치,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로 나타나는 현상은 조선인-한국인에 대한 인종적 우월감으로 표출되고 있다. 일본회의의 인종적 우월감이 대중에게 확산한 것인데 이것은 나치독일의 아리안 인종주의의 위험한 복사판일 수 있다.

일본에서 종전 이전의 가치관에 대한 단죄가 없었던 것에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여섯째, 최근의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노동자 배상판결이나 일본군 위안부 재단 문제에 대한 비이성적 대응, 그리고 반도체 소재부품에 대한 수출규제에 이어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의 한국 제외 조치는 아베 정권이 직접 강제적 제재를 가해 한국 정부와 국민의 저항을 꺾어놓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일곱째, 아베 정권의 강경조치는 통상적 강경대응이 아니라 평화헌법 파기, 전쟁할 수 있는 나라 일본으로 옮겨가는 과정에 한국을 친일국가로 바꾸겠다는 장기적 대 한반도정책의 전환으로 해석된다.

 

4. 대응 방안

과거 식민지배-피지배의 역사를 가진 두 나라에서 아베 일본회의 같은 세력이 집권을 통해 식민지배의 과거를 재현하려 할 경우 혼란과 투쟁이 불가피해진다.

첫째, 한국과 일본에서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향하는 세력들이 신속한 연대를 형성한다.

둘째, 한국에서 아베 일본회의와 그 세력이 근거로 삼고 있는 한일협정에 대한 재협상운동을 모색한다.

셋째, 한국과 일본의 민주-평화세력은 한일협정과 같은 형식과 내용으로 북한과 수교하려는 선례가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넷째, 자유무역 공정거래를 무너뜨리는 횡포가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WTO(세계무역기구) 등 국제기구에서 확인되도록 한다.

다섯째,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들을 비롯한 세계 시민단체들은 2019년 유엔총회에서 미국과 일본 등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국가이기주의를 관철시키기 위해 자유공정무역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을 규탄하는 국제적 연대운동을 전개한다.

 

5. 끝내는 말

지난 3월 29일 서울에서는 대화문화아카데미와 동아시아평화회의 주최로 ‘한일관계: 새로운 백년을 모색한다’는 대화모임이 열렸다. 이 모임의 좌장인 이홍구 전 국무총리는 환영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토야마 총리는 4년 전인 2015년 8월 15일 서울에서 열렸던 동아시아평화 국제회의에 참석한 후 서대문형무소를 찾아 식민지 시대에 옥고를 치렀던 분들의 영전에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함으로써 한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하토야마 총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2015년 한일합의를 ‘최종적이며 불가역적 해결’로 못 박으려는 시도는 한국민의 감정으로는 수용이 어려울 수밖에 없으며, 전쟁에서의 패전국이나 식민통치의 가해국은 사실상 ‘무한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고 시인합니다. 따라서 위안부 문제, 전쟁 중 징용공 문제 등 인간의 존엄과 명예에 관계되는 문제는 한일 양측이 새로운 차원에서 함께 고민하며 풀어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 와다 교수께서는 2010년 이른바 ‘한일병합조약’ 100주년에도 일본 지식인 500명과 한국 지식인 500명의 공동성명에서 그 ‘병합’은 법적으로나 규범적으로 부당한, 조선 국왕이 일본 천황에게 요청했다는 ‘신화(神話)’에 근거한 것으로 원천무효임을 선언한 바 있습니다. 근자에 와다 교수가 우려하는 것은 일본 정부의 한국 무시 및 적대시 태도이며, 1904년에 시작됐던 41년간의 군사점령과 1910년 이래 35년간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한국민의 기억은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식의 분열’을 반영한다고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병합조약’에 대한 무효성과 기만성을 확실히 밝히면서 한일 양국 정부와 국민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이웃 관계를 만들어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들 일본 지식인들은 일본 사회 다수와 다른 방향과 전망을 용기 있게 내놓고 있다. 지난 7월 28일 일본 지식인 75명이 “한국이 ‘적’인가”라는 제목의 현안에 대한 성명도 한국인들의 시각까지 담아냈다.

마지막으로 일본에서는 주목받지 못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의 저서 ‘탈대일본주의(脫大日本主義)’를 언급하는 것으로 끝내겠다. 이 저서에서 하토야마 총리는 일본이 군사강대국을 부활하는 것은 다시 비극을 불러오는 일이라고 경계하면서 일본은 중견국(中堅國 middle power)으로서 강력한 군사력이 아니라 문화예술, 과학기술 생태환경 등으로 동아시아평화공동체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목소리는 일본뿐 아니라 중국 남‧북한에게도 함께 주목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일본 평화헌법 9조가 일본만의 헌법이 아니라 인류의 이상을 담은 공동자산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 지식인은 지난 150여 년 동안의 팽창주의 군사주의 흐름에 대하여 평화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일본에서의 최고의 진보적 가치는 평화헌법 9조 지키기와 군사 대국화 저지라고 하겠다. 제 얘기를 마치겠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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