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윤례 소설가

오랜만에 경의중앙선을 타고 집에 가던 중이었다. 금요일 저녁시간이라 전철 안은 복잡했지만 바깥 풍경은 참 싱그러웠다. 열차가 북한강 철교 위를 달리자 강바람이 전해오는 듯 상쾌해져서 한참을 창밖 풍경에 심취해 있었다.

내 앞에 할머니 세 분이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노트북과 프린트한 원고가 든 배낭을 어깨에 메고, 친구가 텃밭에서 키운 상추랑 깻잎, 오이랑 고추가 가득 든 쇼핑백을 들고 있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딸아이 원피스를 몰래 입고 나와서일까.

딸아이 옷장을 기웃거리다가 처음 보는 원피스를 발견했다. 딱 내 취향이었다. 프릴이 많은 네이비 색상의 무릎까지 내려오는 원피스였다. 팔에 레이스가 팔랑거리는 보라색 블라우스도 맘에 들었다. 사놓고 입지도 않은 옷이 불쌍해서 두벌을 점찍어 놓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마침 딸아이가 안 입는 옷들을 정리했다면서 쇼핑백 하나를 주었다. 새 옷을 줄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하고 얼른 헤쳐 보았더니 점찍은 옷은 없었다. 하루만 빌려 달라고 하면 제일 아끼는 옷이라면서 투덜거릴 게 분명했다. 내 옷은 맘에 들면 속옷까지도 다 뺏어 입으면서. 아들애는 내가 맘에 드는 표정을 하거나 예쁘다고 말을 하면 아끼던 것도 바로 주거나 사주는데.

사실은 내 옷이나 물건을 딸애나 아들애가 입거나 쓴다고 가져가면 기분이 참 좋다. 막 주고 싶다. 지금까지 내가 아끼던 것들을 얼마나 많이 주었는데, 하면서 딸아이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딱 한 번만 입고 옷장에 걸어두면 어떻게 알겠어, 그러면서.

쇼핑백이 무겁게 느껴져서 손을 바꿔 드는데 바로 앞좌석에 앉은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힘들지요?”하고 말을 걸어왔다. 정 많은 할머니라고 생각하며 그냥 웃었다. 그랬더니 그 옆에 앉은 할머니가 피곤해 보인다고 했다. 괜찮다고 하며 한번 웃어주었다. 그러자 또 그 옆에 앉은 할머니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미안해요. 막달인가 본데. 진작 못 봐서 미안해요.”

“우리가 얘기에 정신이 팔려서 이제야 봤네.”

그러면서 세 분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잉? 막달?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느라 팔을 쭈욱 뻗어 올리자 원피스가 따라 올라가며 완전 임신복처럼 나풀나풀 춤을 추며 돌아다니는 듯했다. 순간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 나이가 몇인데. 늦둥이 볼 나이처럼 보이나. 어쩐지 발걸음이 가볍더라.

“저 괜찮아요. 여기서 내리니까 그냥 앉아 계세요. 감사합니다.”

안심을 시킨 뒤 다른 자리로 옮겨갔다. 그러면서 보니 ‘미래의 주인공을 맞이하는 핑크카펫’ 이라고 핑크색으로 써진 임산부 배려석이었다.

웃음이 멈춰지지 않아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엄청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며 얘기를 해주자 ‘거지소녀’ 같다는 말을 듣고 좋아하는 것과 똑같다고 했다. ‘거지’라는 말은 쏙 빼고 ‘소녀’라는 말에 좋아서 춤추는 것 같다고. 그리고 어디 가서 절대로 얘기하지 말라고 했다. 사람들이 내 배만 쳐다볼 거라고.

그때 딸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혹시 내 원피스 보셨어요? 이번 주 연극동아리에서 공연할 때 입으려고 사놓은 건데 아무리 찾아도 없네. 혹시 내가 이번에 준 옷들 속에 딸려갔나 찾아봐 주실래요?”

헉, 다행이다. 딸아이 옷을 처음으로 몰래 입고 나왔는데 안 들켰으니. 아니 어쩌면 딸아이가 알고 있는데 내가 민망해 할까봐 저렇게 예쁘게 말한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 예뻐 보였다.

세상도 참 예뻐 보인다. 그런데 궁금했다. 할머니들은 왜 나에게 자리를 양보해주려고 했던 것일까?

 

저작권자 © 양평시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