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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산전투’서 거둔 대승, 반격의 계기 마련6․25전쟁 당시 한국군 큰 승리 중 하나
6사단, 적군 3개 사단에 괴멸적 타격 입혀

민족의 가장 큰 아픔인 6․25전쟁 발발 69년이 지났다.

본지는 지난해 지평리전투 소개에 이어 올해는 6․25전쟁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큰 승리를 거둔 용문산전투를 소개한다.

일개 사단급 병력으로 적군 3개 사단의 파상공세를 막아내고 반격에 나서 적 병력 대부분을 괴멸시킨 용문산전투로 국군과 연합군은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반면, 큰 타격을 입은 적군은 휴전까지 고려해야 했다.

6․25전쟁 발발 1년이 다 돼가던 1951년 5월, 양평군 용문산 일대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현장을 계략적으로 소개한다.

전투에서 승리한 6사단 병사들

◆ 용문산전투 이전 상황

1950년 6월 25일,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 민족이 서로에게 총을 겨눈 역사의 아픔이 시작됐다. 적군의 파상공세로 국군은 남으로 남으로 물러났고, 낙동강을 최후 전선으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갔다.

당시 국제사회는 연합군을 파견해 한국전쟁에 가담했고, 연합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는 전과를 올린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과 연합군은 반격에 나서 압록강 유역까지 진격했지만 10월부터 중국군이 개입해 다시 38선 이남 지역으로 철수했다.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마저 포기하고 평택과 삼척을 잇는 북위 37도선 지역까지 물러났다.

그러나 곧 다시 반격을 시작해 3월 15일 서울을 탈환했으며, 4월에는 기존의 38선 지역까지 진출했다. 중국군과 북한군은 4월말에 대공세를 펼치며 남하해왔으나 국군과 유엔군은 공세를 저지하고 서울을 지켜냈다.

◆용문산전투 발발과 전개

용문산전투의 주인공은 국군 제6사단이다. 용문산전투는 ‘6사단의 설욕전’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용문산전투 발발 약 한 달 전 벌어진 사창리전투에서의 패배 때문이다.

용문산전투를 앞둔 6사단 병사들.

중공군의 1차 춘계 대공세로 불리는 5차 공세는 1951년 4월22일 시작됐다. 당시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일진일퇴를 벌이던 중공군은 18개 사단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서울탈환을 목표로 거세게 진격했다.

이때, 화천~가평 전선을 담당하고 있던 6사단은 적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퇴폐해 가평까지 철수하기에 이른다. 이 전투로 6사단은 소총 2263정, 자동화기 168정, 로켓포 66문, 대전차포 2문, 박격포 42문, 곡사포 13문, 그리고 차량 87대의 괴멸적 손실을 입었다. 당시 미 육군 장병들은 6사단 마크를 단 장병을 발견하면 “겁쟁이 블루스타”라고 조롱할 정도여서,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하지만 제6사단은 곧바로 전열을 가다듬었다. 사창리전투에서 낙오한 병력 6313명이 다시 전선으로 복귀해 용문산 1157고지에 방어전선을 세웠다.

이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중공군은 5월 16일 또다시 공세를 전개했다.

공격에 나선 병력은 사창리전투에 나선 중공군 제19병단 제63군 3개 사단(제187, 제188, 제189사단)이었다. 적군은 북한강과 홍천강의 합류점 부근을 방어 중인 미 제9군단의 중앙인 국군 제6사단 지역을 공격해 왔다.

제6사단은 당시 북한강 일대에서 중공군의 공세기도가 감지되자 좌인접 국군 제2사단 제31연대가 화야산에서, 우인접 미 제7사단 제31연대가 두능산에서 주저항선으로 각각 철수함으로써 제2연대만이 청평호 남쪽에 남게 됐다.


5월 18일 낮 동안 중공군은 중대 규모로 국군 제6사단 전초진지인 제2연대를 향해 몇 차례 도하 공격을 시도했으나 모두 격퇴됐다. 2연대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화력을 지원받아 완강하게 저항하며 진지를 고수했다. 중공군은 이곳 전초진지를 주저항선으로 오판해 19일 새벽부터 제187, 제188사단의 주력을 투입해 돌파를 시도했다.2연대는 사창리전투의 결과로 연대장과 일부 참모들이 해임되고 송대후 중령이 신임 연대장으로 부임해 비장한 각오로 방어진지를 준비했다. 연대의 정찰대는 17일 적의 예상도하 지점을 탐색하던 중 이미 도강해 방하리 계곡에 집결중인 중대규모의 중공군을 발견하고 격퇴해 기세를 올렸다.

중공군은 우전방 공격에 이어 이번에는 예비인 제189사단을 투입해 좌전방 제2대대의 울업산을 집중 공격했다. 제2연대는 나산 일대 전초진지를 확보하고 있었지만 이틀간의 격전으로 다수의 부상자가 속출하고, 또 식량과 탄약이 절대 부족해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었다.

이러한 국군 제2연대의 전황을 간파한 중공군은 19일 야간에 총공격을 개시했고, 이때부터 제1대대는 나산에서, 제3대대는 353고지에서, 제2대대는 427고지에서 전면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조명 지원 하에 진내로 접근한 적과 백병전으로 점철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쳤다.

2연대는 20일 새벽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방어진지 일부가 돌파되고 통신이 두절돼 지휘통제가 불가능한 어려운 상황을 맞기도 했으나 강력한 정신력으로 진지를 지켰다.

제6사단은 어려운 상황에 빠져있던 제2연대와 연결한 후 즉시 반격을 전개했다. 6사단이 20일 하루 동안 올린 전과만도 중공군 사살 4912명, 포로 9명과 소화기 312정에 이르렀다.

파로호 전투에서 사로잡힌 중공군 포로들이 후송을 기다리는 모습.

반면 이날 국군 제6사단은 거의 피해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사단은 5명이 전사하고 200명이 부상을 입는 정도의 경미한 피해였다. 이로써 사단은 사창리 전투의 불명예를 씻고 설욕할 수 있었으며, ‘용문산전투 대승’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6사단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5월 20일 새벽부터 주방어선에 배치돼 있던 제7연대와 제19연대의 병력을 동원해 반격에 나서 중국군의 포위망을 뚫고 427고지를 탈환했다. 그러자 중국군은 5월 21일 공격을 중단하고 물러났다.

◆용문산전투의 결과와 영향

국군 제6사단은 패퇴하는 중국군을 추격해 북한강을 건너 화천호(華川湖, 지금의 파로호) 일대까지 진격해갔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은 1개 연대 병력으로 중국군 1개 군단의 공격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 전투에서 6사단은 사살 확인만 1만7000명 이상, 포로 2000명이라는 큰 전과를 올렸다. 단일 전투로서 이만한 전과는 6.25 전쟁 전체를 통틀어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승이다. 6사단에는 100여 명의 전사자를 비롯해 6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용문산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면서 국군과 유엔군은 수세에서 벗어나 대대적인 반격 작전을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리고 중국군은 잇따라 벌이던 대공세를 멈추고 휴전 협상에 나서게 됐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이를 기념, 화천 저수지를 파로호(破虜湖, 오랑캐를 깨뜨린 곳)로 개명했고, 이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용문산전투를 기리는 전적비는 현재 용문면 신점리와 가평군 설악면 두 곳에 있다.

용문산 신점리에 있는 용문산전투 전적비

황영철 기자  hpd@yp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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