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화재 양평문협 이사

우리 집의 가구들은 낡았지만 나름대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여전히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 장롱은 뒷짐을 진 채 편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제주도에서 건너온 함지박은 작은방에서 잡다한 기념품들을 품고 있다. 오산 미군기지 근처에서 들여온 소박한 사방탁자는 창고 구석에서 뽀얗게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저마다 자리를 지키며 제 깜냥대로 아직 끝나지 않은 소임을 맡아있는 것이다. 이들을 바라보노라면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부족한 내 안목과 두서없는 경제 감각이 민낯을 드러내기에 민망하기도 하지만 조건 없이 이들을 사랑한다.

1960년대 후반에 결혼한 우리 부부는 그 시대를 살아낸 다른 사람들처럼 각자 선 자리에서 온몸으로 격변의 시간을 받아냈다. 전쟁 후 정치 경제도 제자리를 찾지 못했고, 어수선한 사회 환경에 국가 방위에도 틈이 생겨 간첩선이 내려오는 등의 비상상황이 심심찮게 발생했다. 군인인 남편의 귀환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잘살아 보자는 구호를 목이 터지라 외치며 온 국민이 함께 허리를 동여매고도 젖은 소금 가마니를 진 당나귀처럼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독일로 떠난 광부나 간호사가 아니어도 돌이켜 보면 그때는 모두가 애국자였다.

전세금 만원에, 부모님이 힘들게 장만해 주신 포마이카 장롱을 끌어안고, 칠천 원 월급으로 시작한 신혼살림에서 내가 한 일은 아껴 쓰는 일과 나라와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이 전부였다. 자주 옮겨 다녀야 한다는 이유로 경제적인 일을 갖는다는 생각은 엄두도 못 냈던 우매하고 참담한 시절 이야기다.

몇 번의 이사 후 작은 마루가 딸린 열두 평 관사에 살던 어느 겨울, 밤새 피워둔 난로가 과열되어 장롱 문짝에 오솔길이 만들어졌다. 아끼던 물건이기도 했지만 당장 새것을 마련할 형편도 아니어서 함께 지내는데 부대가 이동하느라 단체로 장거리 이사를 하게 되었다. 문 한 짝이 떨어져 나간 모양새로 이삿짐이 배달되었을 때 황당함이라니. 이후 어쩔 수 없이 포마이카 장롱과 이별하게 된 것이다. 마음에 꼭 드는 장롱 하나 장만해서 기와 올린 한옥에 살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 아마 그때부터인 성싶다.

남편이 전역하던 해 먼저 한 일이 가구를 들이는 일이었다. 붉은빛이 도는 화류목장으로 문짝에 꽃과 제비를 상감해 한껏 멋을 부린 것인데 나를 낳으신 어머니께조차 의논 없이 단번에 꿈꾸어 왔던 대로 저질렀다. 퇴직금의 한 귀퉁이를 크게 잘라 냈지만 오랫동안 한옥에 대청마루에 볕살 좋은 남향집을 읊어온, 절대 양보 못한다는 마음을 읽은 까닭인지 남편도 흔쾌히 동의하였다. 새로 입주한 아파트에 제대로 들이지도 못하고 각각 다른 방에 자리한 불편은 멋진 훗날을 위해 참을 수 있었고 경제적 발판을 마련할 곳으로 옮겨가려던 계획이 장롱 크기 때문에 무산되었을 때도 우리는 웃어넘겼다. 한옥을 짓기만 하면 이사도 하지 않을 것이고 제자리를 찾아 놓을 것이기에.

함지박도 사방탁자도 심지어 돌절구마저 아파트에 사는 동안 마련했다. 사물에 대한 소유를 생명의 요구와 같게 여긴 나는 당장 필요하지 않은데도 소유한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해하면서 온갖 구차한 조건을 붙이며 소유를 늘려갔다.

예기치 않은 건강문제로 서둘러 시골집을 지을 즈음에 서서히 장롱문화가 붙박이장으로 바뀌었지만 나는 그 장롱을 없앨 수가 없었다. 집은 한옥이 아닌 양옥목조주택으로 바뀌었고 준비해둔 장롱, 함지박 등도 적당히 들여앉혔으나 대청마루와 화문석의 꿈은 이미 접은 것이 되었다.

가끔 마음이 넉넉해지기라도 한 날은 무소유의 삶도 묵상해보지만 아직은 설익은 전설을 만드는 물건들이 내 소유가 되어 버티고 있기에 모두 끌어안는다. 가구들은 곳곳에 흠집이 생겼고 사람도 함께 늙어간다. 하늘이 청정한 가을날 마당에서 물을 품어가며 바르는 한지 문이 겨우 한옥 사랑의 귀퉁이를 붙잡고 있는데 장롱은 지금도 뒷짐을 진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하늘을 날던 잠자리가 바지랑대 끝에서 잠시 쉬고 있다. 뜬금없이, 창틈으로 조금씩 흘러나오는 살아온 날들의 조각들과 낡은 가구들의 품어내는 이야기를 함께 빨랫줄에 널어 말리고 싶다. 옹색하게 숨겨진 내 마음 자락도 해질 녘 볕살에 내어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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