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석채 목사

양평향린교회가 생긴 것은 2016년 초였다. 2010년 한국기독교장로회라는 개신교 교단에서 52세의 나이에 목회자 신학 과정을 시작한 나는, 이 과정에 필수적인 인턴과정을 ‘개척교회’ 형식으로 하기로 했다. 신학 과정을 시작한 지 10년만인 2019년 4월 말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양평향린교회는 5월 5일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교회 공간을 ‘양평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증여했다.

교회가 시작된 2년 후인 2017-8년에 ‘촛불혁명’이 있었다. 양평에서 ‘바꿈세’와 ‘경실련’이 왕성하게 활동하기 시작할 무렵에 교회가 세워졌다. 광화문과 양평역을 오가며 ‘박근혜 퇴진’과 ‘용문산 난개발 저지’를 외치며 일일시위를 했다. 기억에 지워지지 않는 것은 늦깎이 견습생 목회자로서, 주말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돌아와서 밤을 새워 설교를 작성하곤 했던 일이다. 이렇게 쓴 139회의 설교문들이 인터넷에서 공유돼 있다.(네이버카페-양평향린교회)

나는 양평시민사회와 연계하고자하는 서툰 몸짓을 계속했다. 이제 성장한 시민사회를 보면서 그동안 인내심을 가지고 애쓰신 모든 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교회가 시민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 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는 시대의 길이다. 이 시대가 자본의 무정부적인 욕망의 행동으로 위협받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본의 통제되지 않는 욕망이 생명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면, 그에 대항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생존/사랑의 방식이다.

한편, 개척교회를 하는 내내 사회의 상식적 도덕 수준에도 못 미치는 개신교의 행태들이 마음을 괴롭게 했다. 목도하다시피, 부끄러운 그 현장은 돈과 권력과 성의 영역에 걸쳐 있다. 그러나 오늘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는 개신교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과 독재시대의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 한국의 ‘개신교가 왜 이렇게 힘들어 하는가?’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 왔는데, 가지게 된 나름의 답은 ‘인문학의 부재’이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전통적으로 인문학이 부재했던 곳은 아니다. 조선조까지 강조됐던 것은 유학인 바, 유학은 다름 아닌 인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구 시민사회의 발전을 담고 있는 근대 인문학은 일제 식민지와 독재시대를 거치면서 부재하게 되거나 크게 위축됐다. 이 부재의 현상이 교회에도 큰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다. 교회는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가지고 있지만, ‘사랑하는 구체적 방법’은 인문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개신교를 포함한 그리스도교는 유일신교이다.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신을 믿으며, 그것도 유일한 신을 믿는다. 그리스도교는 ‘유일하신 신이 그리스도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해 자신을 세상에 드러냈고, 그리스도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선택해 자신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 제국과 직접 투쟁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가 속한 유대교의 갱신을 위해 투쟁하였으므로, 종교 내적 인물이다. 그러나 그 당시 로마 식민지 이스라엘 사회의 실질적 권력이었던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투쟁은 정치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그렇게 자신을 내어 주고 가셨다.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부활했고 다시 세상을 심판하러 온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무너져도 결국 유일하신 신의 주권 하에 있고, 새 하늘과 새 땅은 열린다고 믿는다.

성서에서도 ‘이성’의 영역을 귀히 여긴다. 신약성서의 유다서에서는 교회에 몰래 들어와 그리스도에 대한 건전한 믿음을 해치는 사람들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자기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욕합니다. 그들은 이성이 없는 짐승들처럼, 본능으로 아는 것 바로 그 일로 멸망합니다.(유다서 1:10)’ 이제 문을 닫는 양평향린교회가 지난 3년간 인문학을 통해서 교회와 시민사회의 다리를 놓으려고 꾸준히 시도했던 것에 대해 보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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