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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대리의 봄

해거름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밤새 제법 쌓였다. 예년 같지 않게 눈이 적어 겨울다운 정취를 맛보지 못했던 터라 흩뿌리는 눈이 반가워 몇 번이나 창을 열어보았는데 항아리 위에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하마 봄이 올까 기다리는 마음에 연 사흘 마당 구석구석을 서성이며 지난해에 심은 ‘동강 할미꽃’을 찾는데 찾아지지가 않아 서럽다.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친 꽃이거나 도감을 보고 찾아 나선 나무들을 정성 들여 심고 가꾸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앉은자리들이 흩트려져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 못 하는 것들이 늘어나는 중인데 어제는 생뚱맞게 잔디밭 한가운데서 복수초 꽃대를 찾아내고 손뼉을 쳤다.

눈 속에서 숨어 핀 복수초가 영원한 행복이라는 꽃말처럼 노랗게 웃고 있다. 우리 마당의 봄은 감나무 아래로 먼저 찾아든다. 몇 년 전에 터를 잡은 복수초를 신호탄으로 노루귀가 피고, 건너편 주목 아래서 깽깽이풀이 붉은 싹을 밀어 올리면 봄의 향연이 시작되는 것이다. 깨금발을 뛰듯 개미가 옮겨놓는다는 깽깽이풀이 줄을 지어 올라오고 미처 치우지 못한 낙엽들을 긁어내는 갈퀴 사이로 크루커스 몇 개가 보라색 꽃잎을 열었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꽃들을 만난다. 잔디 속에서 봄맞이꽃이 한눈만 열어 배시시 웃고 있고 매화나무는 잔가지 끝에서 꽃을 얼러대는데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는 여직 꿈속인지 붉은 기운만 비친다.

박새 두 마리가 묵은 집을 드나들고 까치도 둘씩 짝을 지어 집 지을 채비를 한다. 연못에서 어리연 묵은 뿌리가 천천히 기지개를 켜면 겨우내 얼음 속에서 자란 물고기들이 볕살에 붉은 꼬리를 일렁거리며 봄을 부른다. 스멀스멀 생명이 살아난다. 돌담에서 영춘화가 웃고 연못 돌 틈에선 돌단풍이 몸피를 키우며 촉을 틔운다.

15년 전에 서울을 축으로 컴퍼스로 원을 그려놓고 차로 한 시간 거리를 찾아 사방을 돌다가 동쪽 방향에 깃발을 꽂았다. 발이 부르트도록 헤맨 끝에 자리 잡은 양평, 이곳을 나는 사랑한다. 저들이 살아내는 것을 지켜보면서 함께 뒹굴었던 동안 모두 내 바람대로 된 것은 아니었다. 살아 있는 것들은 많은 비에 쓸려도 가고, 심한 가뭄에 말라 죽고, 보살핌이 느긋해지면 병이 덮치기도 했다. 우리 또한 어머님을 떠나보내는 등 많은 일을 겪었다. 해마다 나름대로 세운 기준에는 모자란 듯 한해를 마감하지만 봄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볕살에 이끌려 호미를 들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얼었다 녹기를 되풀이해서 벽돌이 비뚤어진 꽃밭 사이 길에 수선화가 날아가 꽃을 품었다. 거제 외도에서 모여 피던 수선화를 생각하며 넓은 자리로 옮겨놓으려다가 벽돌 밑에서 아직 겨울잠에 들어 있는 뱀 한 마리와 마주쳤다. 살아있다. 부드러운 흙에 몸을 의지하여 한 뼘 벽돌 밑에서 겨울을 지내는 생명이 고마워서 가만히 제자리에 벽돌을 놓고 돌아서는데 잠시 몸이 떨렸다. 순전히 놀란 까닭만은 아니다. 죽은 듯이 온몸으로 봄을 기다리는 미물의 모습이 살아 있음의 감동으로 다가온 것이다. 덩달아 숨어있던 개구리도 천천히 움직이고 거미는 꽃잔디 아래쪽으로 몸을 숨긴다. 모두 봄을 부른다.

고라니가 시금치를 다 먹어 버린 날 밤에 군에서 나온 사람이 총소리가 나더라도 놀라지 말란다. 집 뒤 풀숲에 자리 잡은 고라니를 없애겠다는 말에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왔다. 작년 가을에는 여러 날 동안 까치를 잡았었는데 이번에는 고라니를 잡으러 왔단다. 고라니와 까치, 벌레들이 먹고 남겨주면 먹자는 우리의 생각은 여전히 유효한데 내 생각만을 내세울 수 없는 현실이다. 살아있는 것들이 함께, 선하게 살아가는 세상은 생각으로만 그려보는가.

꽃밭과 잔디밭으로 편을 가르고 손끝이 갈라지도록 잡풀을 뽑은 일들이 봄이 오면서 모두 헛일이 되고 말았다. 제자리를 벗어난 꽃들이 옮겨 앉은 자리가 꽃자리가 되어 잡초들과 함께 뒹군다. 올해는 잔디보다 더 많은 봄맞이가 활짝 웃어 줄 것 같다. 수형을 잡는다며 잘라낸 나무들도 방향 없이 가지를 벋어갈 것이니 이 또한 사람의 뜻대로 할 수 없는 일인 것을 이제야 알아챈다. 이제는 봄이 피워내는 대로 누릴 것이다.

강을 따라나선 산책길에 양평 살이 열다섯 해의 삶이 오롯이 따라붙는다. 이맘때면 북쪽으로 날아갈 오리도 텃새가 되었는지 강에서 새끼들과 한가롭게 떠다닌다. 

양평시민의소리  webmaster@yp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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