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희 서울시립대 교수

전 세계적으로 미국 대통령만큼 강력한 파워를 가진 지도자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이 독재자라는 소리는 듣지는 않는다. 이유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철저한 분권화와 지방화 때문이다. 권력을 가장 세게 휘두른다는 현 트럼프 대통령조차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못한다. 그 이유는 지방정부나 참모들조차도 대통령이 하는 일이 온당치 않다고 생각하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방 사법부의 말단 판사도 대통령의 명령이 부당하다 판단하면 여지없이 반대되는 판결을 내려 대통령을 난감하게 만드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 트럼프정권의 초기 행정명령이었던 7개 아랍국가 시민들의 미국입국 금지명령이 워싱턴 등 몇몇 주의 판사들에 의해 거부된 바 있다. 최근에 멕시코 장벽을 설치하기 위한 비상조치도 뉴멕시코 등 해당 주는 물론 여러 다른 주의 주지사들이 반발하는 바람에 난관에 봉착해있다. 우리가 흔히 듣는 ‘청와대 하명(下命)’과 같은 ‘백악관 하명’이라는 용어조차 미국에는 없다.

문민정부 등장 이후 민주주의가 크게 발전했다지만, 대통령 중심의 권력집중 만큼은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소위 제왕적 대통령제(Imperial Presidency)라는 현 제도가 개헌 등의 조치를 통해 통째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정치도 선진국 수준이 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 3년차에 접어든 현재 권력의 속성은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음이 여러 사건에서 드러나고 있다. 작년과 금년 초에 벌어진 몇몇 사건은 온 국민이 실망을 넘어 우려를 하게 만들었다. 청와대에 근무하던 공무원 5급의 32세 행정관이 국군 서열 제2인자인 육군참모총장을 카페로 불러냈다는 뉴스를 보고 온 국민이 깜짝 놀란 사건이 대표적이다.

노무현 대통령 말기의 일이었다. 필자가 서울도심에서 저녁식사 모임이 끝나고 꽤 늦은 시간에 한동네 사는 지인의 차를 얻어 탔다. 그런데 그가 광화문의 옛 정부종합청사에 잠시만 들렀다가 가야한다고 미리 양해를 구했다. 일과시간이 끝나면 정부청사의 육중한 철제 정문은 굳게 닫힌다. 일반인의 차량 출입은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 청와대에서 행정관으로 근무했던 공무원인데, 공무원은 한밤중에도 청사 주차장 출입이 가능하다 했다.

그의 차가 굳게 닫힌 육중한 정부청사 정문 앞에 도착했다. 경비를 서는 젊은 경찰이 플래시를 들고 다가와 운전석 앞 유리에 불빛을 비추더니 곧바로 소리친다. “야, 문 열어! BH차다.” 곧 바로 육중한 철문이 스르르 열리니, 그가 경례를 붙이며 “들어가십쇼!”라고 외친다.

필자는 깜짝 놀랐다. 혹시나 해서 필자도 공무원증을 꺼낼 요량으로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확인하고 있던 차였다. 그때 처음 알았다. BH가 청와대(Blue House)의 영문 약자라는 것을. 그가 행정관 시절 차 앞 유리창에 붙어 있던 청와대 직원 주차스티커를 반납하지 않은 덕(?)을 보았던 것이다. 유리창에 붙어있는 낡은 스티커는 신분확인조차 필요 없는 절대 권력의 한 징표였던 셈이다. ‘아하, 이런 신기한(?) 체험을 해보니, 한 번 권력의 맛을 보면 마약처럼 빠져나오기가 힘이 들겠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던 기억이 있다. 국정농단의 주역인 최 모씨의 출입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으리라.

정권을 잡은 집단이 절대 권력에 도취되면 금방 초심을 잃어버린다. 진보도 보수도 권력의 행태는 별반 다르지 않음을 우리 모두가 목격해오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선진국은 거의 모두 철저한 분권을 추구해온 것이다.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대부분의 권력을 지방에 나눠주는 연방제까지 도입한 것이리라.

촛불시위에 나섰던 시민들이 바라던 뜻도 제왕적 대통령 권력과 그로 인한 적폐는 철저히 청산하되, 결국은 과도한 중앙권력을 분산시키자는 것이 아니었을까? 권력 핵심에서 연속으로 일어나는 권력집중형 사건을 보면서,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이번 정부도 과거 정부의 불행한 실패를 답습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겠다는 걱정이 든다. 순진한 생각일진대,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 권력분산, 전면적 지방자치 등 분권화 개혁을 고대해 본다.

저작권자 © 양평시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