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물머리 가는 길에 용늪이 있다. 용늪은 연꽃이 진 자리에 연밥이 대롱대롱 매달렸다가 그 무게에 겨워 강물 속으로 고꾸라진 연줄기가 기하학적인 무늬를 만들어내는 연밭이다. 갈대와 부들이 어우러진 용늪에는 고니가 자주 놀러온다. 채 녹지 않은 두꺼운 강물이 호박엿 자르는 가위처럼 쨍쨍 깨지는 소리를 내면 얼마나 신기한지 온몸에 전율이 일어난다. 강물을 날카로운 칼로 반듯하게 썰어놓은 것 같다. 삶과 자연과 우주가 하나였던 태곳적 신비로움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가끔 고니 울음소리가 들리면 얼른 집을 나선다. '약속해 꼭! 꼭! 꼭!' 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새벽에 닭이 홰치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소년들의 합창소리나, 운동회 때 응원하는 아이들 소리 같기도 하다. 캄캄한 밤에 들으면 처녀귀신들이 흐느끼는 것도 같고, 도깨비들이 춤추며 내는 괴성처럼도 들린다.

맨 처음 고니를 보던 날을 잊지 못한다. 두물머리의 쓸쓸한 풍경에 취해 걷던 어느 날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강물 위를 걷고 싶어 조심조심 들어가 걸어보았다. 누워도 보고 그림도 그려보다가 다시 밖으로 나와 걷다 보니 벤치 위에 하얀 국화꽃다발이 보였다. 갑자기 밀려오는 슬픔과 상상의 나래들.

그때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다음에 만나자 꼭! 꼭! 꼭! 꼭 그렇게 들리는 것 같았다. 가보니 갈대숲에 가려 보이지 않던 곳에 사람들이 모여 열심히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오십여 마리가 넘는 고니들이 우아한 자태로 강물 위에 떠있었다. 물속에 얼굴을 묻고 물고기를 사냥하기도 하고, 가끔씩 하얀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다른 무리로 날아가 뭐라고 속삭이기도 했다. 어디선가 날아와 우아한 모습으로 수면에 내려앉는 모습은 꼭 수상스키를 타는 모습 같았다. 어찌나 신기하고 신비스런지 휴대폰을 꺼내 사진과 동영상을 찍었다.

그때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갈대숲을 헤치고 부들 숲을 뭉개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인기척에 놀란 고니들이 쭈뼛쭈뼛 경계의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지 마요, 가지 마요.”

누군가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간 그 사람은 고니 떼를 향해 돌멩이를 던졌다. 그러자 놀라서 후다닥 날아가는 고니들, 와중에도 하얀 날개가 어찌나 눈부시던지. 발레 ‘백조의 호수’에서 보았던 우아하고 아름다운 백조가 춤추는 것 같았다.

“하지 말라니까, 참” 하는 소리는 이내 묻혀버리고, 찰칵 찰칵 셔터 누르는 소리와 “와!” 감탄하는 소리들만 들린다. 한 마리도 없이 순식간에 모두 날아가 버린다. 사진 찍는 사람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하지 말라던 사람도 작품 하나 건졌다며 흡족한 표정이다. 여기저기 전화하기 바쁜 사람도 있다. 오늘 큰 거 건졌어. 이따 또 올지도 모르니까 빨리 두물머리로 와. 완전 잔치 분위기다. 그 많던 고니들을 두려움과 공포로 몰아내고.

그렇게 떠나 그해 겨울 오지 않던 고니들은 다행히 이듬해에 또 찾아왔다. 북한강가에서, 두물머리에서, 세미원에서, 강가 건너편에서 고니 떼를 만나면 천사라도 만난 듯 반갑고 행복하다.

그 때문일까. 딱 일 년만 살기로 한 양평에서 벌써 4년째 살고 있다. 두물머리의 겨울을 네 번씩이나 누리고 있는 것이다. 두물머리는 이상한 매력이 있다. 천천히 걷다보면 시간마저 천천히 흐른다. 어쩔 땐 거꾸로도 흐른다. 물안개가 피어오를 때는 레테의 강을 건너 온 느낌이다. 지금까지의 삶은 전생처럼 아련해지고 희미해진다.

빨리 걷다보면 젊음의 샘물을 마신 듯 활기차고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다보니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 다른 삶처럼 느껴진다. 병에 반밖에 남아있지 않던 물이, 두물머리를 산책하다보면 아직 반이나 남아있음에 안도하고 감사해진다. 그래서 소소한 것들이 소중하고 확실하며 행복해진다. 그러니 어떻게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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