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마을을 찾아가는 여행 82

무엇이 아름다운가에 대한 두 번째 열쇠를 준 사람이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건축가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Wolfgang Alexander, 1936-)다. 거리경관 분야에 관한 책을 찾다가 만난 사람이다. 건축학계에서는 이미 유명한 모양이다. 개별 건축물 단위를 넘어서 거리의 경관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를 랜스케이프(Landscape)라고 한다. 굳이 우리말로 하면 조경(造景)이라고 번역되지만, 우리나라에서 조경이란 일반적으로 정원에 수목과 돌 등을 배치하는 말로 사용되므로 일본에서도 조경과 구분해 그냥 랜스케이프라고 쓰고 있다.

랜스케이프는 하나의 지점에서 바라보이는 건축물과 인공조형물들을 상호간의 관계나 지형, 자연의 배경 등과 함께 어우러지도록 설계하는 경관학을 말한다. 거리경관, 지역경관을 목표로 하는 가로설계, 경관설계 등이 내용이다. 한 지역의 경관은 그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정체성과 정서에 필수적으로 영향을 준다. 내가 어떤 공간, 어떤 마을에서 사는가 하는 것은 삶의 상당한 부분을 구성하고 결정하기 때문이다. 랜스케이프는 생활미학이다. 생활과 동떨어진 예술 분야가 아니라 공동체 거주 공간의 미학이다. 그래서 마을만들기의 아름다움의 원칙들이 온전히 들어 있다.

크리스토퍼 알렉산더는 공동체 공간의 거리 경관 미학을 연구한 대표적인 건축가다. 사실 건축학계에서조차 그는 건축가라기보다는 미학철학자에 가깝다고 평가한다. 그의 이론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의 제목이기도 한 ‘패턴 랭귀지’(A Pattern Language) 이론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단어가 모여 문장을 이루고 시를 만들어 내듯이 공간도 그 지역의 여러 가지 생활패턴들이 모여서 구성된다는 이론이다. 패턴 랭귀지는 253개의 세부적이고 기술적인 패턴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모든 패턴들의 바탕에 흐르는 근원과 철학은 그의 또 다른 대표적인 저서인 ‘영원의 건축’(The Timeless Way of Building)에 담겨 있다. 무네요시를 만나고 4년이 흐른 뒤 나는 다시 또 하나의 아름다움의 열쇠인 ‘영원의 건축’에 빠져들었다.

크리스토퍼 알렉산더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고 칭송한 일본 미에현(三重県)의 이세신궁(伊勢神宮). 사진은 위키백과에서 따 왔다.

크리스토퍼는 건축과 공간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영원한 요소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은 주관적이므로 어떤 기준이 있을 수 없다고 방치하는 경향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또 한 명의 사수를 제대로 만난 것이다. 크리스토퍼는 그 요소의 근원이 되는 것은 뭐라 단정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무명(無名)의 무엇이라고 한다. 무명의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이미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는 자유스러움, 열정으로부터 발현된다고 한다. 어느 공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미 오랫동안 살아온 그 공간의 힘과 생활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우리 스스로 속에 무명의 특성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우리의 삶을 가장 자유롭게 풀어놓고 내면의 의도적인 힘을 느슨하게 내려놓기만 한다면, 그래서 은근하면서도 가장 열정적이 될 수만 있다면, 스스로 발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천재적이거나 위대한 건축가가 공간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으로부터 발현된 보통의 그것, 무명의 특성이 가장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오히려 의도된 노력은 무명의 특성을 상실시키는데, 근대화의 과정에서 수많은 의도된 건축가들이 오히려 무명의 특성을 무시하고 왜곡된 현란함을 생산해 왔다는 것이다.

마을만들기의 규범인 ‘미의 조례’(美の条例)가 제정된 가나가와현(神奈川県)의 마나즈루(真鶴町)

그 무명의 특성을 굳이 나열해 본다면 생명력(alive), 편안함(comfortable), 자유로움(free), 무아(egoless) 그리고 영원성(eternal) 등을 들 수 있다고 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크리스토퍼의 미학과 패턴 랭귀지 이론은 일본의 마을만들기에도 실제로 적용돼, 마나즈루(真鶴町)에서 마을만들기 규범인 ‘미의 조례’(美の条例)를 탄생시켰고, 카와고에(川越市) 일번가(一番街)의 아름다운 거리 경관을 만들었다.

아름다움은 의도되고 과장된 천재의 노력으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롭게 풀어놓는 보통사람의 무명의 특성으로부터 나온다는 크리스토퍼의 철학은 무네요시의 미학과도 통하고 있었다. 서양의 무네요시, 건축에서의 무네요시를 만난 기분이었다.

두 명의 미학가를 만난 이후 나는 이제 홀가분해졌다. 아름다움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누구나 예술가일 수 있으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우리가 우리 공간에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로부터 무명의 특성을 잘 발견하고 살려낼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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