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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아름다운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아름다운 마을을 찾아가는 여행 81

이제 두 번째 질문으로 나가 보자.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사람마다 아름답다는 평가는 다를 수 있다. 칸트도 아름답다고 느끼는 보편적 감성은 주관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찾아다니며 내가 고민한 것은 아름다움이 주관적이라고 해서 무엇인가 기준도 없는 채 무작정 방치할 순 없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미학에 관한 책이나 글이 그 답을 주리라 생각하고 서양의 미학을 다룬 책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대개 책들은 미학에 대한 정의를 짧게 내리고 난 후 서양미술이나 음악사조들을 대표하는 개별 작품들에 대한 평론을 주로 다뤘다. 학창시절 미술시간에 익히 배운 사실주의, 인상주의, 상징주의, 모더니즘, 입체파, 표현주의, 야수파, 초현실주의 등등 사조와 작가를 올바르게 잇는 시험문제 말이다. 그런데 어쩌란 말인가. 시험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어떤 사조는 아름답고 어떤 사조는 아름답지 못하단 말인가. 평론가들은 열심히 각 사조의 예술작품을 분석하고 있지만, 정작 아름다움의 뿌리는 말해주지 않았다. 끝없이 쏟아지는 작품들과 다양한 평론들. 머리와 눈은 더 복잡해지고, 고민은 더욱더 미궁에 빠져들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조광지처인 네네(ねね)가 말년을 소박하게 보낸 고다이지(高台寺)의 암자. 일본 다실(茶室)의 전형이기도 하다.

세월이 흐르고 흐르던 중 비로소 나를 매혹시키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일본인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는 일제의 한국강점기에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난하고 조선의 문화유산을 사랑한 대표적인 일본 미학자이다. 그렇지만 적극적 반대운동에 나서지는 않았고, 조선의 미를 ‘비애의 미’(悲哀美)라고 평가한 점 때문에 부정적으로 비판되기도 한다. 그러나 무네요시를 읽어 들어가면 무네요시의 비애미는 결코 부정적인 뜻이 아님을 알게 된다. 무네요시는 일생을 미학을 추구하다가 세계적인 불교철학자인 스즈키 다이세츠(影木大拙)의 영향을 받아 불교철학에도 집중한다. 그리고 그 자신만의 독특한 미학을 정립한다. 무네요시의 미학은 철저히 동양적이다. 미학이 주로 서양적 학문인데 반해 동양적 독자성을 세웠다.

‘미의 법문’(美の法門)이라는 책은 무네요시의 미학을 정리한 집중서이다. 미의 법문은 무네요시가 말년에 쓴 4편의 수필, ‘미의 법문’, ‘무유호추의 원’(無有好醜の願), ‘미의 정토’(美の浄土), ‘미와 법’(法と美)으로 구성된 책이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돼 있다.

무네요시는 우선 진정한 미는 미(美)와 추(醜)를 구별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온다고 한다. 진정한 미는 불이(不二)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불이’란 미와 추를 구별하지 않고, 나와 너를 구별하지 않는 일원성(一元性)을 말한다. 서양의 논리학과 과학은 인식주체와 인식의 대상을 이원화하는 철저한 이원성(二元性)에 입각해 왔다. 따라서 서양의 미학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인식방법을 달리해 미술사조가 변천돼 온 것이다. 아름다움의 인식방법이 불완전하고 상대적일뿐더러 직전의 사조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낳는다. 무네요시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논리적 결과는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의 진정한 기초는 존재한다. 일본의 국보이자 일본 다인(茶人)들로부터 천하대명물로 칭송받는 기자에몬이도차완(喜左衛門井戶茶碗)이라는 조선의 막사발이 대표적이라는 것이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가장 아름다운 도자기라고 칭송하는 조선시대 막사발 기자에몬이도다완(喜左衛門井戶茶碗)

무네요시의 이러한 미학이 최종적으로 자리 잡는 곳은 민예론(民藝論)이다. 무네요시는 여(如)하고 무심(無心)하며 자재(自在)하고 적적(寂寂)함으로부터 진정한 미는 탄생한다고 한다. 꾸밈없는 무념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이도다완은 조선의 이름 없는 도공이 아무런 욕심 없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천하의 아름다움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아름다워지려는 욕심을 가지고 꾸밈에 꾸밈을 더하고, 많은 예술가들이 의도적으로 미를 만들어 내려고 하게 되자 오히려 추(醜)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칸트가 ‘미란 목적성 없이 인식하는 대상의 합목적성’이라고 요약한 것과 통한다. 궁극적으로 무네요시의 미학은 일반인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소박한 아름다움 즉 민예론을 탄생시키게 된 것이다.

성형(性形)과 현란함이 들끓는 시대에 무네요시의 미학은 무엇이 아름다운가를 가려내는 데 걸출한 기준을 준다. 나는 무네요시를 접하면서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보는 물리(物理)가 트이는 전기충격을 받았다. 2012년 뜨거운 한여름, 도서관에서 코를 박고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내가 그리도 찾고 찾던 미학의 자물쇠가 조금씩 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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