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내가 최두형과 상의하여 드디어 한 밤중에 밥을 짓고 말에게 꼴을 먹이고 일제히 산에 올랐다. 때는 차가운 눈이 흩날리고 달빛은 비쳤다 가렸다 하였다. 그런데 눈을 뚫고 길을 열었다. 대각봉(大角峯) 북쪽 낭떠러지를 따라 올라갔다. 그 옆은 천 길이나 되어 깊이를 알 수 없는 계곡이 있었다. 한 번이라도 혹 실족하면 생사를 알 수가 없다. 앞서 가며 짐을 짊어진 역부가 이와 같이 추운 혹한에 배가 고프고 얇은 옷을 입었으니 추위에 얼어 쓰러질까 염려되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 나무를 베고 산을 뚫고 눈을 뚫어 길을 냈다. 마치 싸움터에 나가 적을 대하는 기세와 같다. 어려운 기색이 조금도 없으니 그 정성이 더욱 감탄할 뿐이다.

나는 몇 리를 걸어갔다. 그러나 눈이 깊어 발을 옮길 수가 없었다. 마침내 오위장 최오길이 말에 올라타 눈을 뚫고 절벽을 따라 나아갔다. 말이 넘어지고 혹 엎어지니 고생이 매우 심하였다. 오직 춘길과 이돌이 나를 뒤따르며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말 위에서 시를 지었다.

男兒宦役摠難謀(남아환역총난모) 남아의 벼슬살이는 모두가 어려운데

夢想那期此遠遊(몽상나기차원유) 이 먼 곳에서 유람할 줄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積雪空山三百里(적설공산삼백리) 눈 덮인 텅 빈 산 삼백 리 길을

五更驅馬上峯頭(오경구마상봉두) 오경에 말을 몰아 정상에 올랐노라.

(이하 생략)”

그의 일기에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쓴 굳은 기개와 공인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낄 수 있다. 토문감계의 2차 감계담판〔정해감계담판〕에서 “내 머리는 잘라 갈 수 있을 것이나 우리 국토를 잘라갈 수는 없다〔吾頭可斷 國疆不可縮〕”고 한 그의 말이 그냥 한 말이 아니었음을 뒷바침하는 내용이다. 소설 『토지(土地)』를 지은 박경리(朴景利)도 1995.12.10.자 동아일보 ‘아침을 열며 -’총체적 인식의 결여’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이미 나라의 지배 밖으로 떠난 유민들의 터전을 지켜주기 위하여 목을 내걸고 항쟁한 이중하” 라며 그의 애민 정신과 공복으로서의 자세를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이중하의 외교관으로서의 업적을 정부도 인정한바 있다. 2009년부터 우리 역사상 외교에 기여한 인물의 생애와 업적을 발굴해 새롭게 조명하고 있는 외교부가, 2009년 고려시대 서희(徐熙), 2010년 조선시대 이예(李藝)를 각각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선정한데 이어 2011년도에는 이중하를 선정하였다. 외교 일선에서 국익을 증진시킨 사례를 역사 속 인물을 통해 재조명함으로써 우리 외교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과 자긍심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미디어코리아뉴스는 2011.10.12.자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외교부는 외부 전문가 자문, 부내 토론 등 의견 수렴을 거쳐 2011년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조선 후기 청나라와의 국경획정 협상에서 국가이익 수호에 헌신한 이중하를 선정하였다.(이하 생략)”

3차례의 국경협상이 결렬된 이후 1900년(광무4) 청나라의 약세를 틈타 러시아가 간도를 점령했다. 1903년 대한제국정부는 간도에 북간도관리사를 두고 이를 주한청국공사에 통고하는 한편, 포병을 양성하고 조세를 올려 받아 계속해서 간도영유권을 확보했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조약과 1907년(융희1) 한일신협약을 체결해 한국의 내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한국인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간도에 통감부(統監府) 출장소를 설치하고 군대·헌병·경찰을 파견했다. 1909년(융희3) 일본은 청나라의 간도 영유권을 인정하는 간도협약을 체결함으로써 간도는 청나라에 귀속됐고, 중국은 국경을 접한 북한과 마찰을 겪다가 1962년 비밀 변경조약을 체결한 데 이어 1964년 국경의정서를 교환함으로써 압록강에서 백두산 천지를 양분하고 두만강에 이르는 국경을 획정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일본은 1909년 대한제국 정부의 의사와 무관하게 간도지역을 청에 넘겨버렸기 때문에 당연히 무효이다. 이로써 1881년 청나라가 봉금(封禁)을 해제하고 청국인의 간도이주와 개간을 장려하면서 불거진 청·한 양측의 간도 영유권 문제는 일본의 군사외교 책략과 청국의 타협으로 미봉되어 미래 한·중의 갈등요소로 남게 된 것이다.

양평읍 백안교차로에서 여주방향으로 새로 난 37번 도로와 구37번 도로가 만나는 회현교차로에서 구도로 대한불교조계종 갈월사로 가는 소도로로 진입해 결전아파트로 가는 도로로 좌회전하면 왼쪽에 양평군 향토유적 제41호인 이중하의 묘(양평읍 창대리 산 82번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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