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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걸고 간도를 지킨 이중하(李重夏) (2)

1882년에 청은 이 지역 조선인들을 모두 청의 국적에 편입하겠다는 방침을 일방적으로 고시하였다. 청의 국민이 되거나 나가라는 압박에 한동안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두만강 대안지역에 거주하던 조선인 주민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이때 일부 조선인들이 직접 백두산에 올라 정계비의 내용을 확인한 후 두만강과 토문강은 별개의 것이므로 정계비의 문구대로 조선과 청의 경계는 토문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두만강과 토문강을 구별하지 못하고 두만강이북 지역에 대한 행정권을 행사하려는 청의 시도를 저지해달라고 조선조정에 청원하였다. 현지 농민의 호소를 받아들인 조선 정부는 1883년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을 파견하고 현지 사정에 밝은 김우식에게 정계비와 함께 조선과 중국의 경계를 조사하도록 했다. 조사 결과에 기초하여 조선은 중국의 요구, 즉 간도지역에서 조선인의 퇴거를 거부했다. 토문강 이남의 땅은 조선의 땅임을 명백히 한 것이었다.

1885년 4월에 청나라의 혼춘(琿春)당국이 함경도안무사 조병직(趙秉稷)에게 월경 조선 경작자들을 무력으로 축출할 것임을 통고하고 일부 지방에서 주민을 강제로 추방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조선 농민의 간도지역 이주가 증가함에 따라 이들의 단속과 관할권 문제가 양국 간 국경문제로 비화되면서 1885년 7월 청나라가 토문(土門) 감계(勘界)문제로 관원을 파견한다고 통보하자, 고종은 안변부사(安邊府使) 이중하(李重夏, 1846~1917)를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로 임명하여 이에 응하도록 하였다. 토문감계사란 조선 농민의 간도지역 이주가 증가하면서 이들에 대한 단속과 관할문제가 토문(土門)의 위치를 둘러싼 국경문제로 비화하자 조-청(朝-淸)간 국경회담 감계담판(勘界談判)에 회담대표로 우리 조정이 파견한 일종의 외교관벼슬이름이다. 이렇게 이뤄진 것이 이른바 1차 감계담판(‘을유감계담판’, 또는 ‘감계회담’)이다.

이 회담은 1885년 11월 함경도 회령에서 회동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보다 앞서 7월 토문감계사로 임명된 이중하는 청나라 측 대표인 변무교섭승판처사무(邊務交涉承辦處事務) 덕옥(德玉), 호리초간변황사무(護理招墾邊荒事務) 가원계(賈元桂), 독리상무위(督理商務委) 진영(秦煐)과 회동하였다.

청은 백두산 정계비의 토문은 두만강을 지칭한다면서 정계비의 기록을 조사하기보다는 먼저 두만강의 원류를 조사한 후, 압록강-두만강을 국경으로 획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이중하는 청측 기록을 근거로 두만과 토문은 별개의 강임을 강력히 제기하고, 청측이 정계비의 위조 가능성 및 그 내용을 의심하는 것은 정계비를 세운 청나라 강희제(康熙帝)의 유지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국경획정을 위해서 우선 정계비를 답사할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이중하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청측 대표와 함께 직접 백두산정계비를 답사하면서 논란이 된 강의 원천을 조사했다. 이 답사를 근거로 조선은 토문과 두만이 별개임을 주장하자 청측은 자신들의 주장이 먹혀 들어가지 않게 됐다. 그러나 청측은 이를 수용하지 않고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자는 입장을 굽히지 않아 1차 국경획정 회담은 별다른 합의를 보지 못한 채 결렬로 끝이 났다. 간도를 분쟁 지역으로 남게 한 이중하 외교의 산물이었다.

그 뒤 청나라는 서울 주재의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앞세워 토문감계문제에 정치적 압력을 가해 왔다. 조선이 토문강과 두만강을 별개의 강이라고 내세워 영토 확장의 야심을 드러냈다고 강변하며 다시금 감계할 것을 요구해 왔다. 이에 우리 정부에서는 이중하를 다시금 토문감계사로 기용해 현지로 출발하게 하였다.

토문감계의 2차 감계담판(‘정해감계담판’)은 1887년 4월에 회령에서 시작되었다. 청나라 측 대표인 진영, 덕옥, 총리혼춘흑정자등처둔간변방영무처(總理琿春黑頂子等處屯墾邊防營務處) 방랑(方郎) 등과 회담한 이중하는 도문과 두만이 같은 강임에는 동의하였으나, 토문과 두만은 별개의 것임을 내세워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현지답사에 나선 청나라는 홍단수(紅丹水)를 국경으로 할 것을 강요하며 군대로 위협을 가하였으나, 이중하는 “내 머리는 잘라 갈 수 있을 것이나 우리 국토를 잘라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단호히 그 요구를 거부하였다. 쌍방 간의 대립은 매우 심각해 국경선 전체를 획정 지을 수가 없었다.

홍토수(紅土水)와 석을수(石乙水)가 합류하는 지점 이하로 경계를 가결정하려는 노력을 폈으나, 결국 회담은 아무런 합의를 보지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다. 1888년 정초에 청나라 측이 다시금 감계 재개를 제의해 오자 조선 정부는 이중하를 제3차 감계사로 임명하였다.

이중하는 현지답사 때의 청나라 측 협박에 의한 협상의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양국 정부의 사전 조정이 필요하다고 믿고 본국 정부로 하여금 홍단수를 경계로 하자는 제의를 공사 위안스카이에게 타진하게 하였다. 이에 청나라 측이 현지 회담보다도 앞으로는 양국 정부의 직접 교섭에 의한 문제 해결을 바라게 되어 토문감계의 교섭은 자연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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