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여당 당원들, 무소속 군수후보 선거운동 나서기도

2018년 지방선거 기획특집①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Ⅱ- 두 번째

지난 2007년 양평군수 재선거 당시 활동했던 정가 관계자들은 “당시 한나라당 선거운동원들은 낮에는 강병국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 밤이 되면 김선교 캠프로 몰려왔다”며 “이들이 토박이당과 결탁해 결국 선거가 뒤집어졌다”고 당시를 증언했다.

2007년 양평군수 재선거에서 승리를 확인한 김선교 군수와 지지자들과 환호하고 있다.

◇ 토박이당의 태생

양평 정치에 관심을 가진 주민들 대부분은 지방선거에서 ‘토박이당’의 역할이 절대적이라고 말한다. 지난 지방선거의 결과를 보면 그들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럼 토박이당은 언제, 어떻게 시작됐을까? 한 주민은 “1회 지방선거 때 민병채 전 군수가 민자당 후보로 나섰고, 이때 지역의 뜻있는 젊은 사람들과 처음 만났다. 이들 대부분이 초‧중‧고교 동문들이었고, 학생 때 모범생으로 공부도 잘했다. 그러다보니 졸업 후에도 지역에서 입지가 컸다”고 말했다. 이 주민에 따르면 당시 민 전 군수와 만난 청년들은 그의 식견과 리더십, 개혁의지에 크게 감명 받아 그와 함께하기로 했다. 이들은 당시 민 군수가 운영하던 창원의 회사까지 찾아가 노조와 합의하는 모습, 직원을 가족처럼 대하는 태도 등 그의 실체 모습까지 확인하며 믿음을 더했다고 한다.

민 전 군수도 이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았다. 군수에 당선되자마자 처음 한 일이 공무원 개혁이었다. 당시 관선시대를 거쳐 온 공무원들은 민 군수에 저항했지만 리더십과 효율적인 업무추진력을 갖춘 민 군수를 당해낼 수 없었다. 혁신분위기를 해치는 공무원 50명을 대기발령해 초기에 기선을 제압했던 일화는 아직도 공무원 사회에 회자되기도 한다.

공직사회가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자 민 군수는 기존의 기득권세력보다는 젊은 신흥세력과 만남을 가지며 개혁적인 군수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임기 동안 민 군수 둘레로 모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조직을 형성하면서 ‘토박이당’이 만들어지게 된다.

◇ 토박이당의 성격과 조직체계

한 주민은 토박이당에 대해 “양평 진보와 보수의 합작”이라고 그 성격을 규정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이 말은 당시 토박이당 핵심 구성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해답이 나온다.

토박이당의 핵심 인물로 거론되는 A씨는 철도노조위원장을 지냈고,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한 아주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다. 비상한 두뇌와 핵심을 파악하는 통찰력, 치밀함 등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A씨는 대체로 두뇌역할을 했다. 조직운동에 앞장섰던 B씨는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고, 민자당 사람들과도 곧잘 어울렸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토박이당’을 함께했을까? 한 주민은 “이들은 학교 동문이거나 선후배로 묶여 있었고, 낙후된 양평을 바꿔야 한다는 큰 과제를 공유하고 있었다”고 답했다. 즉, 정치적 성향은 달랐지만 양평개혁에 뜻을 모았고, 무엇보다 학교 동문이라는 농촌사회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학연과 지연으로 묶인 집단이 바로 토박이당이었다.

그럼 토박이당은 어느 정도 규모였을까? 지난 2006년 지방선거에서 토박이당 조직표를 본 적이 있다는 주민은 각 읍면 면책 밑으로 각 리책, 그 밑으로도 많은 활동가들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 증언대로라면 수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토박이당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민 군수 이후 한택수 군수, 김선교 군수를 줄줄이 당선시킨 것을 보면 이 주민의 증언이 전혀 신빙성이 없다고 하기도 어렵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토박이당의 면책과 리책 중 상당수가 당시 집권 보수여당의 당원이었고, 주요 활동가였다는 점이다. 이 주민은 “한나라당 조직원을 한택수 군수나 김선교 군수 선거사무실에서 보는 것은 일상적이었다. 군수는 무소속 후보를 위해 움직이고, 도의원이나 군의원 선거는 자신의 당 후보들을 위해 일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말했다.(다음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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